"신사임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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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 + |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명화|신명화(申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사온|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ref>박용옥,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037 신사임당]",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어머니인 용인 이씨는 강릉 북평촌에서 신사임당을 낳은 뒤 줄곧 남편과 떨어져 강릉에 머물렀기 때문에 신사임당도 외가인 강릉에서 성장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8945&cid=40942&categoryId=34387 신사임당]",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 ||
− | + | 1522년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원수|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다. 신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ref>민백</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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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사임당은 뒤에 아들 [[이이]] 덕분에 정경부인에 증직되었고 그의 유적으로는 탄생지인 [[강릉 오죽헌|오죽헌]]과 묘소가 있는 조운산이 있다.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이이의 나이는 16세였다. 십대 중반에 어머니를 여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조모의 따뜻한 정은 관직에 나가서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한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650&cid=59015&categoryId=59015 신사임당]",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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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임당은 아들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현모양처로 인품과 재능을 겸비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사임당은 [[이이|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동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던 [[소세양|소세양(蘇世讓)]]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신씨의 그림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이이|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안견(安堅)]] 다음가는 화가라 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650&cid=59015&categoryId=59015 신사임당]",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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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신사임당의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들은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묵포도도(墨葡萄圖)〉, 〈노련도(鷺蓮圖)〉, 〈어하도(魚鰕圖)〉 등이 있다. 안견과 중국 명나라 초기의 산수화 유파인 절파(浙派)의 영향이 드러나는 〈산수도〉는 대담하고 간결한 구도로 산수를 묘사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표현 기법이 동시에 나타난다.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있는 〈신사임당초충도병(申師任堂草蟲圖屛)〉에는 8폭의 초충도가 전해진다. 여기에는 오이와 메뚜기, 접시꽃과 잠자리,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양귀비와 풀거미, 봉숭아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이 섬세한 필치와 구도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이후에 제작된 화첩 등에 신사임당의 것으로 수록되어 있는 그림들이 다수 전해진다.<ref>두산백과</ref> | + | 오늘날 신사임당의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들은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묵포도도(墨葡萄圖)〉, 〈노련도(鷺蓮圖)〉, 〈어하도(魚鰕圖)〉 등이 있다. 안견과 중국 명나라 초기의 산수화 유파인 절파(浙派)의 영향이 드러나는 〈산수도〉는 대담하고 간결한 구도로 산수를 묘사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표현 기법이 동시에 나타난다.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있는 〈신사임당초충도병(申師任堂草蟲圖屛)〉에는 8폭의 초충도가 전해진다. 여기에는 오이와 메뚜기, 접시꽃과 잠자리,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양귀비와 풀거미, 봉숭아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이 섬세한 필치와 구도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이후에 제작된 화첩 등에 신사임당의 것으로 수록되어 있는 그림들이 다수 전해진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8945&cid=40942&categoryId=34387 신사임당]",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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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인용 및 참조=== | ===인용 및 참조=== | ||
+ | *박용옥,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037 신사임당]",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8945&cid=40942&categoryId=34387 신사임당]",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650&cid=59015&categoryId=59015 신사임당]",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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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 ===더 읽을거리=== | ||
*강석진, 『예술을 사랑한 신사임당 21세기에 다시 만나 보는 신사임당 이야기』, 레몬북스, 2017. | *강석진, 『예술을 사랑한 신사임당 21세기에 다시 만나 보는 신사임당 이야기』, 레몬북스, 2017. |
2017년 11월 7일 (화) 23:22 판
신사임당(申師任堂) | |
대표명칭 | 신사임당 |
---|---|
한자표기 | 申師任堂 |
생몰년 | 1504년(연산군 10)-1551년(명종 6) |
본관 | 평산(平山) |
이칭 |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 |
출생지 | 강원도 강릉 북평촌 |
시대 | 조선 |
배우자 | 이원수(李元秀) |
부 | 신명화(申命和) |
모 | 용인 이씨 이사온(李思溫)의 딸 |
자녀 | 이이(李珥) |
성격 | 예술가 |
유형 | 인물 |
정의
조선 중기의 여류예술가.
내용
생애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1] 어머니인 용인 이씨는 강릉 북평촌에서 신사임당을 낳은 뒤 줄곧 남편과 떨어져 강릉에 머물렀기 때문에 신사임당도 외가인 강릉에서 성장했다.[2]
1522년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다. 신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3]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재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간혹 아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부군인 이원수의 나이가 51세였고 사임당이 사망한 이후 10년을 더 살았다. 부인을 잃은 후 이원수는 어린 자식들 때문이었는지 재혼하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했다.[4]
사임당은 뒤에 아들 이이 덕분에 정경부인에 증직되었고 그의 유적으로는 탄생지인 오죽헌과 묘소가 있는 조운산이 있다.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이이의 나이는 16세였다. 십대 중반에 어머니를 여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조모의 따뜻한 정은 관직에 나가서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한다.[5]
신사임당의 예술
사임당은 아들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현모양처로 인품과 재능을 겸비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동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던 소세양(蘇世讓)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신씨의 그림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安堅) 다음가는 화가라 했다.[6]
오늘날 신사임당의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들은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묵포도도(墨葡萄圖)〉, 〈노련도(鷺蓮圖)〉, 〈어하도(魚鰕圖)〉 등이 있다. 안견과 중국 명나라 초기의 산수화 유파인 절파(浙派)의 영향이 드러나는 〈산수도〉는 대담하고 간결한 구도로 산수를 묘사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표현 기법이 동시에 나타난다.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있는 〈신사임당초충도병(申師任堂草蟲圖屛)〉에는 8폭의 초충도가 전해진다. 여기에는 오이와 메뚜기, 접시꽃과 잠자리,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양귀비와 풀거미, 봉숭아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이 섬세한 필치와 구도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이후에 제작된 화첩 등에 신사임당의 것으로 수록되어 있는 그림들이 다수 전해진다.[7]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신사임당 | 신명화 | A는 B의 딸이다 | |
이원수 | 신사임당 | A는 B의 남편이다 | |
이이 | 신사임당 | A는 B의 아들이다 | |
신사임당초서병풍 | 신사임당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
신사임당초충도병 | 신사임당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
신사임당 | 유대관령망친정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신사임당 | 태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자리도 | 신사임당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
산수도 | 신사임당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
연조도 | 신사임당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
신사임당 | 강릉 오죽헌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박용옥, "신사임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사임당",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민백
- ↑ "신사임당",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사임당",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사임당",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사임당",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박용옥, "신사임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신사임당",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신사임당",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더 읽을거리
- 강석진, 『예술을 사랑한 신사임당 21세기에 다시 만나 보는 신사임당 이야기』, 레몬북스, 2017.
- 김세서리아, 「율곡(栗谷)의 「선비행장(先批行狀)」에 대한 여성주의 독해 -사임당의 보살핌 행위와 여성주의 보살핌의 윤리를 중심으로-,」 『율곡학연구』 30, 율곡연구원, 2015, 93-118쪽.
- 박민자, 「신사임당 탄신 50주년 기념논문 - 신사임당에 대한 여성사회학적 조명」, 『밤나골 이야기』 17, 율곡학회, 2005, 19-48쪽.
- 박지현, 「화가에서 어머니로 - 신사임당을 둘러싼 담론의 역사」, 『동양한문학연구』 25, 동양한문학회, 2007, 141-167쪽.
- 유정은, 「신사임당(申師任堂)과 옥산(玉山) 이우(李瑀)의 서화(書畵) 예술철학(藝術哲學)」, 『한문고전연구』 34, 한국한문고전학회 34, 2017, 191-230쪽.
- 유정은, 『사임당 평전 스스로 빛났던 예술가』, 리베르, 2016.
- 유정은, 『申師任堂 藝術哲學 硏究』, 강원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 유현숙, 『신사임당의 효사상 연구』, 성산효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 정문교, 「신사임당의 생애와 유훈」, 『율곡학보』 1, 율곡연구원, 1995, 69-84쪽.
- 주영애, 「申師任堂(신사임당)의 生涯(생애)에 나타난 셀프리더십과 어머니 리더십에 관한 연구- 현대 여성의 리더십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중심으로」, 『동양철학연구』 80, 동양철학연구회, 2014, 169-2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