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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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상복]]인 [[곤룡포]]를 착용할 때 쓰는 관. |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상복]]인 [[곤룡포]]를 착용할 때 쓰는 관. | ||
− | ==어원== | + | ==착용신분과 착용상황== |
+ | * 왕과 왕세자의 [[상복]]. | ||
+ | * 왕세자 [[관례]] 시의 [[초가복]]. | ||
+ | * 왕, 왕세자, 왕세손의 익선관 형태는 모두 같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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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모의 각(角)이 위로 올라와 관의 모양이 ‘善(蟮, 매미날개)’자와 같기 때문에 이름 붙여짐. | * 관모의 각(角)이 위로 올라와 관의 모양이 ‘善(蟮, 매미날개)’자와 같기 때문에 이름 붙여짐. | ||
* ‘오사절상건(烏紗折上巾)’이라고 하기도 하고,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관의 형태를 말로 풀음. | * ‘오사절상건(烏紗折上巾)’이라고 하기도 하고,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관의 형태를 말로 풀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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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北周)에서 기원한 [[복두(幞頭)]]는 전쟁 수행에 편한 것으로 당나라 태종(太宗)은 천하에 전쟁이 끝난 것을 비유하여 복두를 모델로 익선관을 만들었음.<ref>『唐書』 卷24, 「車服志」 “太宗嘗以幞頭起於後周, 便武事者也. 方天下偃兵, 採古制爲翼善冠, 自服之.”</ref> | 북주(北周)에서 기원한 [[복두(幞頭)]]는 전쟁 수행에 편한 것으로 당나라 태종(太宗)은 천하에 전쟁이 끝난 것을 비유하여 복두를 모델로 익선관을 만들었음.<ref>『唐書』 卷24, 「車服志」 “太宗嘗以幞頭起於後周, 便武事者也. 方天下偃兵, 採古制爲翼善冠, 自服之.”</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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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층의 형태로 앞은 낮고 뒤는 높으며 모라(帽羅)<ref>세종 26년에 사여된 익선관은 ‘검은색 추사[香皂皺紗]’로 기록됨(『조선왕조실록』 「세종 26년 3월 26일」)</ref>로 관을 싸고 뒷부분에는 2개의 뿔[角]이 위로 곧게 붙어 있음.<ref>『國朝續五禮儀補序例』「殿下視事服圖說」 “冠以毛羅裹之, 兩大角兩小角貼後向上.”</ref> | * 2층의 형태로 앞은 낮고 뒤는 높으며 모라(帽羅)<ref>세종 26년에 사여된 익선관은 ‘검은색 추사[香皂皺紗]’로 기록됨(『조선왕조실록』 「세종 26년 3월 26일」)</ref>로 관을 싸고 뒷부분에는 2개의 뿔[角]이 위로 곧게 붙어 있음.<ref>『國朝續五禮儀補序例』「殿下視事服圖說」 “冠以毛羅裹之, 兩大角兩小角貼後向上.”</ref> | ||
* 조선 중기 이후 2층이 높아지고 2개의 뿔의 폭도 넓어졌다가 조선 말기에 2층이 낮아지는 형태. | * 조선 중기 이후 2층이 높아지고 2개의 뿔의 폭도 넓어졌다가 조선 말기에 2층이 낮아지는 형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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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조속오례의보서례 익선관.jpg|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전하시사복도설(殿下視事服圖說)」의 익선관. | 파일:국조속오례의보서례 익선관.jpg|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전하시사복도설(殿下視事服圖說)」의 익선관. | ||
파일:대한예전 익선관.jpg| 『대한예전(大韓禮典)』의 익선관. | 파일:대한예전 익선관.jpg| 『대한예전(大韓禮典)』의 익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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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조 익선관.jpg| 태조 익선관 착용 어진. 전주 경기전 소장. | 파일:태조 익선관.jpg| 태조 익선관 착용 어진. 전주 경기전 소장. | ||
파일:영조 익선관.jpg| 영조 익선관 착용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파일:영조 익선관.jpg| 영조 익선관 착용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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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柳喜卿(1963) 「우리나라의 冠帽」, 대한가정학회, 대한가정학회지 제4권 | |
+ | 李民周(1991) 「朝鮮時代 王族冠帽에 關한 硏究」, 한국복식학회, 服飾 vol.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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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일 (수) 16:45 판
익선관(翼善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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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360px|thumb|center|]] | |
대표명칭 | 익선관(翼善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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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翼蟮冠 |
착용신분 | 왕, 왕세자, 왕세손 |
착용성별 | 남성 |
정의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상복인 곤룡포를 착용할 때 쓰는 관.
착용신분과 착용상황
기본 정보
어원
- 관모의 각(角)이 위로 올라와 관의 모양이 ‘善(蟮, 매미날개)’자와 같기 때문에 이름 붙여짐.
- ‘오사절상건(烏紗折上巾)’이라고 하기도 하고,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관의 형태를 말로 풀음.
유래
북주(北周)에서 기원한 복두(幞頭)는 전쟁 수행에 편한 것으로 당나라 태종(太宗)은 천하에 전쟁이 끝난 것을 비유하여 복두를 모델로 익선관을 만들었음.[1]
기본 형태
- 2층의 형태로 앞은 낮고 뒤는 높으며 모라(帽羅)[2]로 관을 싸고 뒷부분에는 2개의 뿔[角]이 위로 곧게 붙어 있음.[3]
- 조선 중기 이후 2층이 높아지고 2개의 뿔의 폭도 넓어졌다가 조선 말기에 2층이 낮아지는 형태.
관련항목
노드 | 관계 | 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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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관 | 관계 | 관련노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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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柳喜卿(1963) 「우리나라의 冠帽」, 대한가정학회, 대한가정학회지 제4권 李民周(1991) 「朝鮮時代 王族冠帽에 關한 硏究」, 한국복식학회, 服飾 vol.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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