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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8일 (수) 21:47 판
이광려(李匡呂) | |
대표명칭 | 이광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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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李匡呂 |
생몰년 | 1720-1783 |
본관 | 전주(全州) |
호 | 월암(月巖)·칠탄(七灘) |
자 | 성재(聖載)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부 | 이진수(李眞洙) |
정의
이광려(李匡呂, 1720-1783)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내용
생애
이광려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재(聖載), 호는 월암(月巖)·칠탄(七灘). 아버지는 이진수(李眞洙)이다. 이광려는 인품도 훌륭했고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또 문장이 뛰어나 따르는 제자가 많았고,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광려는 문장에 뛰어난 인물로서, 그의 문인(門人)에게 그대로 전해져 신대우(申大羽)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1]
활동
한편, 그는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하던 당시의 시대 흐름 속에서 일찍부터 책을 통하여 고구마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다.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趙曮)이 대마도로부터 고구마를 들여오자 곧 재배에 착수하였으나 기술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시도는 당시 동래부사(東萊府使)였던 강필리(姜必履)에게 자극을 주어 고구마재배에 성공을 거두게 한 밑바탕이 됐다.[2]
저술활동
저서로는 『이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3] 또한 이광려는 이광사의 묘비인 「원교선생묘지명(圓嶠先生墓誌銘)」을 쓰기도 했는데 여기에 묘사된 이광사의 외형은 그의 초상화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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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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