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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헌(湛軒)이라는 당호(堂號)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지전설|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화이(華夷)의 구분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19 홍대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 담헌(湛軒)이라는 당호(堂號)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지전설|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화이(華夷)의 구분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REF> 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19 홍대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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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과 공직 진출=== | ===학업과 공직 진출=== | ||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박지원(朴趾源)]]과는 깊은 친분이 있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1775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1776년 사헌부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박지원(朴趾源)]]과는 깊은 친분이 있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1775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1776년 사헌부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 ||
− | 그의 활약은 이런 관직과 관련된 것이기보다는 1765년 초의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가능해진 것이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19 홍대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 그의 활약은 이런 관직과 관련된 것이기보다는 1765년 초의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가능해진 것이었다.<REF> 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19 홍대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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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방문=== | ===북경 방문=== | ||
『담헌서(湛軒書)』는 약간의 시·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 년 사이에 쓴 것이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홍억|홍억(洪檍)]]의 수행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6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는데,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杭州) 출신의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갖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 『담헌서(湛軒書)』는 약간의 시·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 년 사이에 쓴 것이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홍억|홍억(洪檍)]]의 수행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6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는데,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杭州) 출신의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갖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 ||
− | 이 때 북경에서 깊이 사귄 [[엄성|엄성(嚴誠)]]·[[반정균|반정균(潘庭筠)]]·[[육비|육비(陸飛)]] 등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19 홍대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 이 때 북경에서 깊이 사귄 [[엄성|엄성(嚴誠)]]·[[반정균|반정균(潘庭筠)]]·[[육비|육비(陸飛)]] 등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REF> 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19 홍대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사상적 성숙 - 천주교=== | ===사상적 성숙 - 천주교=== | ||
− |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북경 방문은 「[[연기|연기(燕記)]]」 속에 상세히 남아 있다. 그의 「연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기록 가운데 「[[유포문답|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인 [[유송령|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 + |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북경 방문은 「[[연기|연기(燕記)]]」 속에 상세히 남아 있다. 그의 「연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기록 가운데 「[[유포문답|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인 [[유송령|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REF> 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19 홍대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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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성숙 - 과학사상=== | ===사상적 성숙 - 과학사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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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논문 | ||
− | ** 유재형, 「담헌 홍대용의 제일등인 논쟁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2016. | + | ** 유재형, 「담헌 홍대용의 제일등인 논쟁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논문, 2016. |
** 어윤정, 「湛軒 洪大容의 科擧制 認識과 人材登用 改革論」,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2014. | ** 어윤정, 「湛軒 洪大容의 科擧制 認識과 人材登用 改革論」,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2014. | ||
** 박성래, 「洪大容의 과학사상」, 『교수아카데미총서』, Vol.7 No.1 , 1994, 1-9쪽. | ** 박성래, 「洪大容의 과학사상」, 『교수아카데미총서』, Vol.7 No.1 , 1994, 1-9쪽. |
2017년 11월 1일 (수) 23:12 판
홍대용(洪大容) | |
대표명칭 | 홍대용 |
---|---|
한자표기 | 洪大容 |
생몰년 | 1731년-1783년 |
본관 | 남양(南陽) |
호 | 홍지(弘之) |
자 | 덕보(德保)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사헌부감찰 / 세손익위사시직, 선공감감역, 사헌부감찰, 태인현감, 영천군수 |
부 | 홍역(洪櫟) |
모 | 홍역 처 청풍 김씨 |
성격 | 실학자, 과학사상가 |
유형 | 인물 |
정의
1731(영조 7)∼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
개요
담헌(湛軒)이라는 당호(堂號)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화이(華夷)의 구분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1]
학업과 공직 진출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과는 깊은 친분이 있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1775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1776년 사헌부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그의 활약은 이런 관직과 관련된 것이기보다는 1765년 초의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가능해진 것이었다.[2] -->
북경 방문
『담헌서(湛軒書)』는 약간의 시·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 년 사이에 쓴 것이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의 수행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6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는데,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杭州) 출신의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갖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이 때 북경에서 깊이 사귄 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육비(陸飛) 등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3]
사상적 성숙 - 천주교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북경 방문은 「연기(燕記)」 속에 상세히 남아 있다. 그의 「연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기록 가운데 「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인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홍대용 | 을병연행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항전척독 | 홍대용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항전척독 | 엄성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항전척독 | 반정균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항전척독 | 육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연기 | 홍대용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연기 | 열하일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연기 | 유포문답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유포문답 | 천주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유포문답 | 유송령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유포문답 | 포우관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주석
- ↑ 박성래, "홍대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성래, "홍대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성래, "홍대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성래, "홍대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저서
- 홍대용, 민족문화추진회, 『(新編 국역)홍대용 담헌서』,한국학술정보, 2008.
- 김태준, 『홍대용』, 한길사, 위대한 한국인, 1998.
- 김태준, 『洪大容 評傳』, 民音社, 대우학술총서, 1987.
- 논문
- 유재형, 「담헌 홍대용의 제일등인 논쟁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논문, 2016.
- 어윤정, 「湛軒 洪大容의 科擧制 認識과 人材登用 改革論」,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2014.
- 박성래, 「洪大容의 과학사상」, 『교수아카데미총서』, Vol.7 No.1 , 1994, 1-9쪽.
- 전상운 ,천관우 ,이원순, 『학술좌담 : 담헌 (湛軒) 홍대용』, 「韓國學報」, Vol.7 No.2 , 1981, 2181-22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