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응태 무고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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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정응태(丁應泰)]]와 지휘관 [[양호|양호(楊鎬)]] 사이에 내분으로 일어난 사건.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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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598년 9월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와 지휘관 양호 사이에 내분으로 소위 ‘정응태 무고 사건’이 일어나자, 선조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류성룡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것을 바랐으나, 류성룡은 이항복과 윤두수를 추천했다. 여정이 먼 중국 사신 길이 부담스럽고 명나라 내분에 휩쓸리면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돼 같은 해 11월 19일 마침내 파직된다.[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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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명나라 찬화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한다'는 무고를 올려 파란이 일었다. 당시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조정에서는 정승인 유성룡 등 동인들을 사신으로 보내려 했으나 사태수습에 자신이 없던 유성룡은 이를 고사했다. 이에 서인인 백사 이항복이 정사, 젊은 이정구는 부사, 서기관으로 한호(한석봉)이 뽑혀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월사의 문장력은 이때 빛을 발하는데 정응태의 모함에 맞서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정응태를 파직시켰다.[이정구 위키]  
1598년 명나라 찬화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한다'는 무고를 올려 파란이 일었다. 당시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조정에서는 정승인 유성룡 등 동인들을 사신으로 보내려 했으나 사태수습에 자신이 없던 유성룡은 이를 고사했다. 이에 서인인 백사 이항복이 정사, 젊은 이정구는 부사, 서기관으로 한호(한석봉)이 뽑혀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월사의 문장력은 이때 빛을 발하는데 정응태의 모함에 맞서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정응태를 파직시켰다.[이정구 위키]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으로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정응태는 명나라 구원병 책임자로 조선에 와 있던 양호(楊鎬) 장군과 갈등하던 중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허위로 보고를 했다. 만약 명나라가 지원군을 회군한다면 전력에 손실이 나타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이항복은 당시 공조참판인 월사 이정구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으로 대동하고 명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명나라로 하여금 정응태를 파면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다.[이항봉 위키]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으로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정응태는 명나라 구원병 책임자로 조선에 와 있던 양호(楊鎬) 장군과 갈등하던 중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허위로 보고를 했다. 만약 명나라가 지원군을 회군한다면 전력에 손실이 나타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이항복은 당시 공조참판인 월사 이정구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으로 대동하고 명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명나라로 하여금 정응태를 파면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다.[이항봉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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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록에 의하면 정응태의 무고는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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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조선의 군신들이 명나라 장수 양호와 결탁하여 천자를 기만하고 항거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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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홰구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범하고 요하를 탕추ㅣ하여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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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조선과 일본의 사신들이 서로 지극히 친절하다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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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연호를 기록함에 일본의 연호는 크게 쓰고 중국의 연호는 작게 표시하여 일본을 더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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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임금을 태조, 세도라하여 천자의 칭호와 같이 祖자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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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선은 1차로 7월 1일에 최천건 일행을, 2차로 8월 1일에 이원익 일행을, 3차로 10월 21일에 이항복 일행을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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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전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과 이정구가 작성한 무술변무주의 논리로 해명에 성공하여 정응태를 파면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블로그]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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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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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7일 (금) 17:05 판

정응태 무고사건(丁應泰 誣告事件)
대표명칭 정응태 무고사건
한자표기 丁應泰 誣告事件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598년
관련인물 류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 이정구(李廷龜)
관련단체 변무사(辨誣使)



정의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丁應泰)와 지휘관 양호(楊鎬) 사이에 내분으로 일어난 사건.

내용

1598년 명나라 찬화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한다'는 무고를 올려 파란이 일었다. 당시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조정에서는 정승인 유성룡 등 동인들을 사신으로 보내려 했으나 사태수습에 자신이 없던 유성룡은 이를 고사했다. 이에 서인인 백사 이항복이 정사, 젊은 이정구는 부사, 서기관으로 한호(한석봉)이 뽑혀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월사의 문장력은 이때 빛을 발하는데 정응태의 모함에 맞서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정응태를 파직시켰다.[이정구 위키]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으로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정응태는 명나라 구원병 책임자로 조선에 와 있던 양호(楊鎬) 장군과 갈등하던 중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허위로 보고를 했다. 만약 명나라가 지원군을 회군한다면 전력에 손실이 나타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이항복은 당시 공조참판인 월사 이정구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으로 대동하고 명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명나라로 하여금 정응태를 파면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다.[이항봉 위키]

조천록에 의하면 정응태의 무고는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선의 군신들이 명나라 장수 양호와 결탁하여 천자를 기만하고 항거하려 하였다. 둘째 홰구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범하고 요하를 탕추ㅣ하여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려한다. 셋째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조선과 일본의 사신들이 서로 지극히 친절하다고 적혀있다. 넷째 연호를 기록함에 일본의 연호는 크게 쓰고 중국의 연호는 작게 표시하여 일본을 더 높이고 있다. 다섯째 임금을 태조, 세도라하여 천자의 칭호와 같이 祖자를 사용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선은 1차로 7월 1일에 최천건 일행을, 2차로 8월 1일에 이원익 일행을, 3차로 10월 21일에 이항복 일행을 파견하였다.

결국 조전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과 이정구가 작성한 무술변무주의 논리로 해명에 성공하여 정응태를 파면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블로그]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조천록 이항복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조천록 정응태 무고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백사집 조천록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주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