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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때 체찰사(軆察使)가 양주(楊州)에 있으면서 율을 불러다가 일을 의논하는 동안에 경이 모든 군사를 시켜 이틀 동안에 성책을 완성한 후에, 율이 돌아왔고, 목책(木柵)을 만든 지 사흘만에 적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이에 정오(正午)가 지나도록 힘껏 싸우니, 적병은 드디어 긴 나무[長木]를 가져다가 다락같은 모양의 높다란 가마[轎]를 만들어서,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싣고 수백 명이 메어 올려 우리 진영 안을 사격하므로 조경이 지자포(地字砲)를 가져오게 하여, 큰 칼 두 개를 포(砲) 앞에 매어달고 적의 가마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포를 쏘니, 지나간 곳마다 천둥ㆍ벼락을 맞은 것 같아서 가마는 모두 부숴지고 가마 위에 있던 적병은 몸뚱이와 팔ㆍ다리가 흩어져 날아가 떨어졌으므로 적병이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하였다.<br/> | 마침 그때 체찰사(軆察使)가 양주(楊州)에 있으면서 율을 불러다가 일을 의논하는 동안에 경이 모든 군사를 시켜 이틀 동안에 성책을 완성한 후에, 율이 돌아왔고, 목책(木柵)을 만든 지 사흘만에 적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이에 정오(正午)가 지나도록 힘껏 싸우니, 적병은 드디어 긴 나무[長木]를 가져다가 다락같은 모양의 높다란 가마[轎]를 만들어서,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싣고 수백 명이 메어 올려 우리 진영 안을 사격하므로 조경이 지자포(地字砲)를 가져오게 하여, 큰 칼 두 개를 포(砲) 앞에 매어달고 적의 가마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포를 쏘니, 지나간 곳마다 천둥ㆍ벼락을 맞은 것 같아서 가마는 모두 부숴지고 가마 위에 있던 적병은 몸뚱이와 팔ㆍ다리가 흩어져 날아가 떨어졌으므로 적병이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하였다.<br/> | ||
이 싸움에서 적병은 죽은 자가 거의 반이나 되었다. 권율과 모든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는 모두 공(公 조경)의 힘이요.” 하였음을 대개 그가 목책을 설치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풍양군(豐壤君) 조경(趙儆)의 비(碑)<br/> | 이 싸움에서 적병은 죽은 자가 거의 반이나 되었다. 권율과 모든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는 모두 공(公 조경)의 힘이요.” 하였음을 대개 그가 목책을 설치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풍양군(豐壤君) 조경(趙儆)의 비(碑)<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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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599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어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 + | 명나라 [[척계광]]이 편찬한 [[기효신서|기효신서(紀效新書)]]의 새로운 진법을 1593년 [[낙상지|낙상지(駱尙志)]]의 소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 편제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고, 이듬해 훈련대장이 되었다.<br/> |
| + | 1599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어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
2017년 10월 30일 (월) 17:31 판
| 조경(趙儆) | |
| 대표명칭 | 조경 |
|---|---|
| 한자표기 | 趙儆 |
| 생몰년 | 1541년-1609년 |
| 본관 | 풍양(豊壤) |
| 시호 | 장의(莊毅) |
| 자 | 사척(士惕) |
| 시대 | 조선 |
| 대표직함 | 훈련대장, 한성부판윤, 회령부사 |
| 성격 | 무신 |
| 유형 | 무장 |
정의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조선 중기의 무신.
설명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제주목사를 거쳐 1591년(선조 24) 강계부사로 있을 때, 유배되어 온 정철(鄭澈)을 우대하였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가 되어 황간·추풍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그 뒤 금산에서 왜군을 격퇴시키고 부상을 당하였다.
이 해 겨울 수원부사로서 수십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의 권율(權慄)을 지원하였다. 1593년 2월 권율과 함께 행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어 가선대부에 가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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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趙儆)이 권율의 중군장(中軍將)으로서 밤에 강을 건너가서 먼저 지형을 살피다가 군사를 주둔시킬 만한 높은 언덕을 발견하니 그것이 즉 행주였다. 권율이 말하기를, “명 나라의 군사가 많이 왔으니 적병이 필시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성책(城柵)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니 경이, “외로운 군사로서 큰 적과 가까이 있으니 성책이 없을 수 없다.” 하였으나 율이 듣지 아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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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 | ||
명나라 척계광이 편찬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새로운 진법을 1593년 낙상지(駱尙志)의 소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 편제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고, 이듬해 훈련대장이 되었다.
1599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어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조경 | 추풍령 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조경 | 행주대첩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정기룡 | 추풍령 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조경묘 출토 유의일괄 | 서울역사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박석호-추풍령싸움 | 조경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시간정보
| 시간정보 | 내용 |
|---|---|
| 1592년 4월 | 조경이 추풍령 전투에 참가하였다 |
| 1593년 2월 | 조경이 행주대첩에 참가하였다 |
공간정보
| 위도 | 경도 | 내용 |
|---|---|---|
| 36.209167 | 128.008257 | 추풍령은 조경과 관련이 있다 |
| 37.600108 | 126.824711 | 행주산성은 조경과 관련이 있다 |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