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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은 예서(禮書)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혹된 점을 일일이 초출하여 조목마다 그의 사견을 첨부하여 [[예의유집 | 『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후학들의 예서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밖에도[[돈효록 | 『돈효록(敦孝錄)』]], [[보민록 | 『보민록(保民錄)』]], [[돈녕록 | 『돈녕록(敦寧錄)』]], [[겸재집 | 『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가 있다.<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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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은 1747년 [[화동정음통석운고 |『화동정음통석운고』]]를 저술하였다. 또한 박성원은 예서(禮書)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혹된 점을 일일이 초출하여 조목마다 그의 사견을 첨부하여 [[예의유집 | 『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후학들의 예서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밖에도[[돈효록 | 『돈효록(敦孝錄)』]], [[보민록 | 『보민록(保民錄)』]], [[돈녕록 | 『돈녕록(敦寧錄)』]], [[겸재집 | 『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가 있다.<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화동정음통석운고 |『화동정음통석운고』]]의 저술
 
영조 23년(1747)에 지은 것인데, 정조 11년(1787) 책머리에 정조가 정음통석서(正音通釋序)를 써서 간행시켰기 때문에 『정음통석(正音通釋)』이라고도 한다. 그밖에 이본이 몇 종류가 있다. [[삼운통고 | 『삼운통고(三韻通考)』]]와 [[사성통해 |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의거하여 당시의 우리 나라와 중국의 한자음을 밝힌 운서다. 중국어 역관인 이언용(李彦容)이 많이 도왔다고 한다.<ref>이응백 외,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네이버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89208&cid=41708&categoryId=41711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10월 26일 (목) 20:43 판

박성원(朴聖源)
대표명칭 박성원
한자표기 朴聖源
생몰년 1697-1767
본관 밀양(密陽)
겸재(謙齋)
사수(士洙)
대표저서 보민록, 겸재집
대표직함 지평, 세손강서원유선
유형 문신


정의

박성원(1697∼1767)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내용

생애 및 관직활동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 호는 겸재(謙齋).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 70세이상 문관 정이품이상의 노인 우대소)에 들어감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배소에 가시울타리를 쳐 그 안에 가두어 둠) 되었다가 2년 뒤 석방되었다.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하였으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

학술활동 및 저서

학술활동

그는 효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근본이 되는 점을 들어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됨을 정책적인 차원에서 실시해보려는 의도를 그의 저술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호락논쟁에 관련해서는 그의 심성론은 스승인 이간(李柬)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洛論)에 동조하였다.[2]

저서

박성원은 1747년 『화동정음통석운고』를 저술하였다. 또한 박성원은 예서(禮書)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혹된 점을 일일이 초출하여 조목마다 그의 사견을 첨부하여 『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후학들의 예서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밖에도 『돈효록(敦孝錄)』, 『보민록(保民錄)』, 『돈녕록(敦寧錄)』, 『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가 있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박성원 화동정음통석운고 A는 B를 저술하였다
화동정음통석운고 사성통해 A는 B와 관련이 있다
화동정음통석운고 언문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재 박성원 A는 B의 스승이다
이간 박성원 A는 B의 스승이다
박성원 호락논쟁 A는 B에 참여하였다
화동정음통석운고 삼운통고 A는 B와 관련이 있다
겸재집 박성원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보민록 박성원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윤정, 「謙齋 朴聖源의 禮學과 『禮疑類輯』의 성격」, 『韓國文化』Vol.61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