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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학수(鶴叟). 서종엽(徐宗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명인(徐命仁)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서직수(徐直修)이다. 어머니는 조영극(趙榮克)의 딸이다. |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학수(鶴叟). 서종엽(徐宗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명인(徐命仁)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서직수(徐直修)이다. 어머니는 조영극(趙榮克)의 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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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문의 관직생활은 수차례 유배와 제직, 복관을 반복하는 등 평탄치 않았다. | 서유문의 관직생활은 수차례 유배와 제직, 복관을 반복하는 등 평탄치 않았다. | ||
− | 1787년 | + | 178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대사간, 충청감사, 이조참의, 의주부윤, 평안감사 및 사옹원(司饔院)의 감선제조(監膳提調) 등을 역임하면서 천릉도감(遷陵都監)에서 일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 1822년에는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ref>박광용,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113 서유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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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과 연행록=== | ===사행과 연행록=== | ||
1798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이듬해에 귀국, 한글로 된 기행문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을 저술하였다.<ref>박광용,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113 서유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1798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이듬해에 귀국, 한글로 된 기행문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을 저술하였다.<ref>박광용,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113 서유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무오연행록은 청나라에서의 견문(見聞) · 경과사(經過事) · 감상(感想)을 6권에 걸쳐 상세히 적은 기행문으로,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보다 17년 뒤에 나왔다. 이 작품의 특색은 한문으로 된 다른 기행문에 비하여 한글로 씌어졌다는 점이다.<ref>이응백 외,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네이버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89384&cid=41708&categoryId=41711 서유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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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 ==시각자료== |
2017년 10월 26일 (목) 20:20 판
서유문(徐有聞) | |
대표명칭 | 서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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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徐有聞 |
생몰년 | 1762-1822 |
본관 | 달성(達城) |
자 | 학수(鶴叟) |
부 | 서직수(徐直修) |
모 | 조영극(趙榮克)의 딸 |
정의
서유문(徐有聞, 1762-1822)은 조선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학수(鶴叟). 서종엽(徐宗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명인(徐命仁)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서직수(徐直修)이다. 어머니는 조영극(趙榮克)의 딸이다.
관직활동
서유문의 관직생활은 수차례 유배와 제직, 복관을 반복하는 등 평탄치 않았다. 178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대사간, 충청감사, 이조참의, 의주부윤, 평안감사 및 사옹원(司饔院)의 감선제조(監膳提調) 등을 역임하면서 천릉도감(遷陵都監)에서 일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 1822년에는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1]
사행과 연행록
1798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이듬해에 귀국, 한글로 된 기행문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을 저술하였다.[2] 무오연행록은 청나라에서의 견문(見聞) · 경과사(經過事) · 감상(感想)을 6권에 걸쳐 상세히 적은 기행문으로,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보다 17년 뒤에 나왔다. 이 작품의 특색은 한문으로 된 다른 기행문에 비하여 한글로 씌어졌다는 점이다.[3]
시각자료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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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