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권근의 학문) |
|||
48번째 줄: | 48번째 줄: | ||
===권근의 학문=== | ===권근의 학문=== | ||
[[이색|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김구용(金九容)]]·[[박상충|박상충(朴尙衷)]]·[[이숭인|이숭인(李崇仁)]]·[[정도전|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양촌집(陽村集)]]』 40권을 남겼다. <ref>민백</ref> 그의 《[[입학도설|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이황(李滉)]] ·[[장현광|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ref> [네이버 지식백과] 권근 [權近] (두산백과)</ref> | [[이색|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김구용(金九容)]]·[[박상충|박상충(朴尙衷)]]·[[이숭인|이숭인(李崇仁)]]·[[정도전|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양촌집(陽村集)]]』 40권을 남겼다. <ref>민백</ref> 그의 《[[입학도설|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이황(李滉)]] ·[[장현광|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ref> [네이버 지식백과] 권근 [權近] (두산백과)</ref> | ||
+ | |||
+ | 1394년 충주 청룡사지에 있는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忠州靑龍寺普覺國師幻庵定慧圓融塔碑)]]의 비문을 썼다. | ||
=='''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7년 10월 6일 (금) 23:36 판
권근(權近) | |
대표명칭 | 권근 |
---|---|
한자표기 | 權近 |
생몰년 | 1352-1409 |
본관 | 안동(安東) |
이칭 | 권진(權晉) |
시호 | 문충(文忠) |
호 | 양촌(陽村), 소오자(小烏子) |
자 | 가원(可遠), 사숙(思叔) |
시대 | 고려, 조선 |
대표저서 | 양촌집 |
대표직함 | 중추원사, 정당문학, 대사헌 |
부 | 권희(權僖) |
성격 | 문신, 서예가, 공신 |
유형 | 인물 |
목차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
내용
가계와 탄생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권보(權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권희(權僖)이다.
고려시대의 활동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화친함)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조선시대의 활동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태조의 아버지 환조(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다.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 저술하여 정리함)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해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권근의 학문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陽村集)』 40권을 남겼다. [1]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 ·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2]
1394년 충주 청룡사지에 있는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忠州靑龍寺普覺國師幻庵定慧圓融塔碑)의 비문을 썼다.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