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굴암 본존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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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7324 석굴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 ||
+ |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으로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7324 석굴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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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존상은 국내 최대의 석굴불상으로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의 둥근 연화대(蓮華臺)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한 장륙(丈六)의 여래상(如來像)은 원숙한 조각수법이 통일신라시대 석조 조각기술의 백미(白眉)이며, 사실적인 표현에서 또한 완벽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석굴암의 조성을 위하여 삼국통일에 의한 신라의 풍부한 국력과 옛 백제나 고구려를 망라하여 소집된 명공들의 기술과 정성이 모두 결집되어 이루어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29769&cid=50766&categoryId=50794 석굴암석굴]", 종교학대사전<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br/> | ||
+ |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본존불의 명칭이다. [[항마촉지인]]은 [[선정인]]의 상태에서 오른손을 풀어 검지로 땅을 가리키는 형태로, 이 수인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성도할 때 지신(地神)을 깨우쳐 자신의 성도를 증명하게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ref>허균,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5999 경주 석굴암석굴 ② - 감은 듯 뜬 듯한 '三昧의 눈' 깨달음의 열락 전신에 가득]", 『불교신문』, 2006년 09월 20일.</ref>,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본존불이 경전에 나타나는 어느 부처님을 표현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고, 대체로 이 불상이 석가모니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견해에 익숙해져 있었다.<ref>이기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62 경주 석굴암 석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 ||
+ | 또한,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본존불은 그 위치로 보아서나, 또는 불국사와의 관련에서 판단할 때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서방에 위치하는 극락정토(極樂淨土)의 본존인 아미타불로 보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ref>이기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62 경주 석굴암 석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 ||
+ |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멀리 동해로 그 시선을 돌리고 있는 이 본존불, 또 그 바로 뒤에 본원을 이 현세에서 구현하는 보처보살로서의 관음보살이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추정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ref>이기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62 경주 석굴암 석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 ||
+ | 또한,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7324 석굴암]",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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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4일 (수) 22:39 판
경주 석굴암 본존불 (慶州 石窟庵 本尊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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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주 석굴암 본존불 |
---|---|
한자표기 | 慶州 石窟庵 本尊佛 |
이칭 |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 본존불상 |
유형 | 불상 |
시대 | 신라 |
소장처 |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873-243 |
관련인물 | 김대성 |
|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석굴암 석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내용
석굴의 구조와 조각상
경주 석굴암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1]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2]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으로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3]
본존상의 명호
본존상은 국내 최대의 석굴불상으로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의 둥근 연화대(蓮華臺)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한 장륙(丈六)의 여래상(如來像)은 원숙한 조각수법이 통일신라시대 석조 조각기술의 백미(白眉)이며, 사실적인 표현에서 또한 완벽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석굴암의 조성을 위하여 삼국통일에 의한 신라의 풍부한 국력과 옛 백제나 고구려를 망라하여 소집된 명공들의 기술과 정성이 모두 결집되어 이루어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4]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본존불의 명칭이다. 항마촉지인은 선정인의 상태에서 오른손을 풀어 검지로 땅을 가리키는 형태로, 이 수인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성도할 때 지신(地神)을 깨우쳐 자신의 성도를 증명하게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5],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본존불이 경전에 나타나는 어느 부처님을 표현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고, 대체로 이 불상이 석가모니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견해에 익숙해져 있었다.[6]
또한,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본존불은 그 위치로 보아서나, 또는 불국사와의 관련에서 판단할 때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서방에 위치하는 극락정토(極樂淨土)의 본존인 아미타불로 보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7]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멀리 동해로 그 시선을 돌리고 있는 이 본존불, 또 그 바로 뒤에 본원을 이 현세에서 구현하는 보처보살로서의 관음보살이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추정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8]
또한,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9]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경주 석굴암 | 김대성 | A는 B가 창건하였다 | A ekc:founder B |
삼국유사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불국사고금창기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산중일기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경주 석굴암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석굴암",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석굴암",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석굴암",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석굴암석굴",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허균, "경주 석굴암석굴 ② - 감은 듯 뜬 듯한 '三昧의 눈' 깨달음의 열락 전신에 가득", 『불교신문』, 2006년 09월 20일.
- ↑ 이기영 "경주 석굴암 석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기영 "경주 석굴암 석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기영 "경주 석굴암 석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석굴암",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경주 석굴암 석굴",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허균, "경주 석굴암석굴 ② - 감은 듯 뜬 듯한 '三昧의 눈' 깨달음의 열락 전신에 가득", 『불교신문』, 2006년 09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