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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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는 865년(경문왕 4)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며, 비문에서는 윤다의 출생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는 865년(경문왕 4)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며, 비문에서는 윤다의 출생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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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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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다는 7~8세에 이미 출가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가 심하였고, 거듭된 설득 끝에 마침내 출가를 하게 되었다. 비문에서는 이와 같은 갈등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윤다는 7~8세에 이미 출가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가 심하였고, 거듭된 설득 끝에 마침내 출가를 하게 되었다. 비문에서는 이와 같은 갈등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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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이후 윤다는 가야갑신수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의 태안사였다. 윤다는 태안사에서 상방화상이었던 ○여 선사를 만나 그의 법맥을 전해 받게 된다. ○여 선사는 혜철의 사법제자(嗣法弟子)로. 혜철은 도의, 홍척과 함께 당 나라의 지장에게서 선을 배우고 귀국하여 구산선문 가운데 동리산문을 개창한 승려이다. 즉 윤다는 서당으로부터 시작하여 혜철과 ○여로 이어진 법맥을 이어받은 승려로, 비문에는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출가 이후 윤다는 가야갑신수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의 태안사였다. 윤다는 태안사에서 상방화상이었던 ○여 선사를 만나 그의 법맥을 전해 받게 된다. ○여 선사는 혜철의 사법제자(嗣法弟子)로. 혜철은 도의, 홍척과 함께 당 나라의 지장에게서 선을 배우고 귀국하여 구산선문 가운데 동리산문을 개창한 승려이다. 즉 윤다는 서당으로부터 시작하여 혜철과 ○여로 이어진 법맥을 이어받은 승려로, 비문에는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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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다는 그의 명성으로 인하여 왕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에는 효공왕이 윤다에게 편지를 보내 복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윤다는 그의 명성으로 인하여 왕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에는 효공왕이 윤다에게 편지를 보내 복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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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고려 때에는 왕건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은 관리를 보내어 윤다를 궁궐로 모셔와 빈객의 예로서 대우하였으며, 왕건의 아들인 왕욱은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기를 희망한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윤다가 본래 그의 거처로 돌아가길 희망한다고 왕건에게 청하자 토지와 노비 등의 공양을 제공하여 내려보냈다.  
 
특히 고려 때에는 왕건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은 관리를 보내어 윤다를 궁궐로 모셔와 빈객의 예로서 대우하였으며, 왕건의 아들인 왕욱은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기를 희망한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윤다가 본래 그의 거처로 돌아가길 희망한다고 왕건에게 청하자 토지와 노비 등의 공양을 제공하여 내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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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다의 사상적인 측면은 왕건과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 통해 그는 선뿐만 아니라 교를 아우르는 선교일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윤다의 사상적인 측면은 왕건과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 통해 그는 선뿐만 아니라 교를 아우르는 선교일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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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다는 945년(혜종 2) 82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의 죽음의 장면은 다음과 같이 비문에서 묘사되었다.
 
윤다는 945년(혜종 2) 82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의 죽음의 장면은 다음과 같이 비문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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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2일 (수) 17:36 판


윤다(允多)()
대표명칭 윤다(允多)
생몰년 864(경문왕 4)-945(혜종 2)
시호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
법신(法信)
출신지 경주
승탑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
승탑비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는 865년(경문왕 4)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며, 비문에서는 윤다의 출생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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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가수행

윤다는 7~8세에 이미 출가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가 심하였고, 거듭된 설득 끝에 마침내 출가를 하게 되었다. 비문에서는 이와 같은 갈등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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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활동

출가 이후 윤다는 가야갑신수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의 태안사였다. 윤다는 태안사에서 상방화상이었던 ○여 선사를 만나 그의 법맥을 전해 받게 된다. ○여 선사는 혜철의 사법제자(嗣法弟子)로. 혜철은 도의, 홍척과 함께 당 나라의 지장에게서 선을 배우고 귀국하여 구산선문 가운데 동리산문을 개창한 승려이다. 즉 윤다는 서당으로부터 시작하여 혜철과 ○여로 이어진 법맥을 이어받은 승려로, 비문에는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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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윤다는 그의 명성으로 인하여 왕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에는 효공왕이 윤다에게 편지를 보내 복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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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특히 고려 때에는 왕건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은 관리를 보내어 윤다를 궁궐로 모셔와 빈객의 예로서 대우하였으며, 왕건의 아들인 왕욱은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기를 희망한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윤다가 본래 그의 거처로 돌아가길 희망한다고 왕건에게 청하자 토지와 노비 등의 공양을 제공하여 내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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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윤다의 사상적인 측면은 왕건과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 통해 그는 선뿐만 아니라 교를 아우르는 선교일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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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윤다는 945년(혜종 2) 82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의 죽음의 장면은 다음과 같이 비문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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