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관련항목) |
|||
18번째 줄: | 18번째 줄: | ||
|승탑= | |승탑= | ||
|승탑비=[[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승탑비=[[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
− | |필드수= | + | |필드수=12 |
}} | }} | ||
37번째 줄: | 37번째 줄: | ||
===태몽=== | ===태몽=== | ||
− | 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 원문(같은책 311쪽: 母金氏 魂交之夕 忽得休徵 見胡僧入房 擎玉案爲寄 ▨欻焉驚覺 尋報藁砧 答云必生懷寳之兒 先告弄璋之慶 ▨後▨於室內 每有鐙煇之▨▨)</ref> | + | 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br>*원문(같은책 311쪽: 母金氏 魂交之夕 忽得休徵 見胡僧入房 擎玉案爲寄 ▨欻焉驚覺 尋報藁砧 答云必生懷寳之兒 先告弄璋之慶 ▨後▨於室內 每有鐙煇之▨▨)</ref> |
--- | --- |
2017년 2월 21일 (화) 00:34 판
형미(逈微)() | |
대표명칭 | 형미(逈微) |
---|---|
영문명칭 | Hyeongmi |
생몰년 | 864(경문왕 4)-917(경명왕 1) |
시호 | 선각대사(先覺大師) |
휘 | 형미(逈微) |
탑호 | 편광(遍光) |
성씨 | 최씨(崔氏) |
본관 | 박릉(博陵) |
출신지 | 무주(武州: 현재의 광주) |
승탑비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1]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2]
태몽
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3]
--- 체징(體澄)은 804년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지방인 웅진(熊津)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그는 물을 관장하는 전설 속의 신(神)인 하백(河伯)과 같이 건장한 체격을 가진 금발 머리의 아이었다고 전해진다.[4] 체징은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827년(흥덕왕 2) 24세의 나이에 오늘날 충청남도 서산에 위치한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하고 있던 염거(廉居)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염거는 신라에 처음으로 선종(禪綜)을 도입한 승려인 도의(道義)의 제자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체징은 도의부터 이어지는 법맥을 전해 받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5] 837년(희강왕 2) 체징은 동료들과 함께 당나라로의 유학을 떠났으나, 자신이 배웠던 선법이 중국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바로 귀국하였다.[6] 이후 체징은 858년(헌안왕 2) 부터 무주(武州) 황학(黃壑)의 난약(蘭若)에 머물렀는데, 당시 왕인 헌안왕(憲安王)은 장사현(長沙縣) 부사(副使) 김언경(金彦卿)을 파견하여 체징을 서울(경주)로 모시고자 하였다. 체징은 여러번 고사하였으나, 거듭된 왕의 요청에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갔으며, 그곳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중건하였다. 체징은 880년(헌강왕 6) 77세의 나이로 입적할때까지 도의로부터 이어지는 선법(禪法)을 전파하였다. ---
관련항목
node | relation | node |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는 -를 위한 비이다 | 형미(逈微) |
체징(體澄) | 는 -의 스승이다 | 형미(逈微) |
운거도응선사(雲居道膺禪師) | 는 -의 스승이다 | 형미(逈微) |
형미(逈微) | 는 -에서 주석하였다 |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
형미(逈微) | 는 -에서 수행하였다 |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
형미(逈微) | 는 -에서 계를 받았다 | 구례 화엄사(求禮 華嚴寺) |
궁예(弓裔) | 는 -와 관련있다 | 형미(逈微) |
왕건(王建) | 는 -와 관련있다 | 형미(逈微) |
왕건(王建) | 는 -의 이름을 지었다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는 -에 있다 |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지었다 | 최언위(崔彦撝)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썼다 | 유훈율(柳勳律)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새겼다 |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 |
참고문헌
- 조범환, 「新羅 下代 體澄 禪師와 迦智山門의 개창」, 『정신문화연구』 Vol.28 No.3,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3-24쪽.
- 최선희, 「체징과 가지산문 개창」, 『역사학연구』, 호남사학회 25, 2005, 1-27쪽.
- 이계표, 「신라 하대의 가지산문」, 『역사학연구』, 호남사학회 7, 1993, 265-294쪽.
- 곽승훈, 「김영의 보조선사비명 찬술」, 『신라사학보』 제27호, 신라사학회, 2013.4, 197-232쪽.
각주
- ↑ 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
-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2쪽.
-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br>*원문(같은책 311쪽: 母金氏 魂交之夕 忽得休徵 見胡僧入房 擎玉案爲寄 ▨欻焉驚覺 尋報藁砧 答云必生懷寳之兒 先告弄璋之慶 ▨後▨於室內 每有鐙煇之▨▨)
- ↑ 비문
- ↑ 조범환, 新羅 下代 體澄 禪師와 迦智山門의 개창, 정신문화연구 Vol.28 No.3, 2005, 7쪽.
-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 불교사의 이해, (주)조계종출판사, 2014, 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