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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일 (월) 23:13 판
백동수(白東脩) | |
대표명칭 | 백동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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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白東脩 |
생몰년 | 1743년-1816년 |
본관 | 수원(水原) |
이칭 | 야뇌(野餒) |
호 | 인재(靭齋) |
자 | 영숙(永叔)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장용영 초관, 훈련원 주부, 훈련원 판관, 평안도 박천군수, 군기시 부정 |
성격 | 무신 |
유형 | 인물 |
정의
조선 후기의 무관으로 1790년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였다. [1]
내용
무예가 뛰어나 당대에 창검(槍劍)의 일인자로 꼽혔고, 마술(馬術)과 궁술(弓術)에도 뛰어났다. 박지원(朴趾源)ㆍ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도 깊이 교유하여 학문에도 높은 성취를 이루었고, 서예에도 능해 전서(篆書)ㆍ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다고 전해진다.
가족관계
1743년(영조 19년)에 한양에서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를 지낸 백사굉(白師宏)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인 백시구(白時耉)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무반(武班)이었지만 조부인 백상화(白尙華)가 서자였기에 서얼의 신분이었다. 누이가 같은 서얼 신분인 실학자 이덕무에게 시집을 가서 그와는 매부와 처남 관계로 매우 가깝게 지냈다.[2]
생애 및 활동사항
왜검(倭劍)을 조선에 전한 김체건(金體乾)의 아들인 김광택(金光澤)에게 무예를 배웠으며, 1771년(영조 47년)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1773년에 가족과 함께 강원도 기린협(麒麟峽, 지금의 강원도 인제)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며 무예를 연마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뒤 이기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 등을 중용하고, 1779년 이덕무ㆍ유득공ㆍ박제가 등 서얼 출신의 인사를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하자 1780년(정조 4년)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1785년(정조 9년) 정조가 친위군영인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자 추천되어 집춘영(集春營)과 어영청(御營廳) 초관(哨官)을 역임하고 1788년부터 장용영 초관으로 근무했다. 1790년(정조 14년)에는 왕명으로 이덕무ㆍ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는데, 그는 직접 기예를 시험해 보면서 편찬 작업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4권 4책으로 편찬된 <무예도보통지>는 24종에 이르는 각종 무예를 그림을 덧붙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훈련용 병서이다. 1790년 병사들의 병서 강습과 무예 훈련을 담당하는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이듬해 종5품의 부사직(副司直) 직위에 올라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었다. 1792년에는 충청도 비인현감(庇仁縣監)이 되었다가 1795년에는 종4품의 훈련원 첨정(僉正)이 되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뒤에는 평안도 박천군수(博川郡守)로 임명되었다가 뇌물을 받았다는 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06년(순조 6년)에는 영의정 이병모(李秉模)의 주장으로 다시 유배되고 관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금고형(禁錮刑)을 받았다. 1810년에는 서용되어 종3품의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이 되었으나 1816년(순조 16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주석
- ↑ "백동수(白東脩)",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백동수(白東脩)",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백동수(白東脩)",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사료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