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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왕세자를 감계하기 위해 저술한 책으로, 영조 자신이 임금으로 재위하는 동안 실행에 옮기지 못한 신념과 사업이 세자에 의해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역대 제왕의 사적 중 모범이 될 만한 내용을 간추려 편찬한 『[[자성편|자성편(自省編)]]』을 언해한 책이다. | [[영조]]가 왕세자를 감계하기 위해 저술한 책으로, 영조 자신이 임금으로 재위하는 동안 실행에 옮기지 못한 신념과 사업이 세자에 의해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역대 제왕의 사적 중 모범이 될 만한 내용을 간추려 편찬한 『[[자성편|자성편(自省編)]]』을 언해한 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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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자신을 성찰하고 왕세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역대 제왕의 사적 중 모범이 될 만한 내용을 간추려 편찬한 『[[자성편|자성편(自省編)]]』을 언해한 책이다. 한문본은 1746년 문정전(文政殿)에서 2권 2책으로 편집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본래 한문본과 함께 간행하려 했던 초본(草本)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체가 정연하고 흘림이 없으며, 편집이 잘 되어 있고 표지 장정이 호화롭다. 언해본의 언해자 및 필사자, 시기 등은 알 수 없다. | [[영조]]가 자신을 성찰하고 왕세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역대 제왕의 사적 중 모범이 될 만한 내용을 간추려 편찬한 『[[자성편|자성편(自省編)]]』을 언해한 책이다. 한문본은 1746년 문정전(文政殿)에서 2권 2책으로 편집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본래 한문본과 함께 간행하려 했던 초본(草本)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체가 정연하고 흘림이 없으며, 편집이 잘 되어 있고 표지 장정이 호화롭다. 언해본의 언해자 및 필사자, 시기 등은 알 수 없다. | ||
책의 체재는 「수서(首序)」, 「내편(內篇)」, 「외편(外篇)」, 「소지(小識)」, 「고교제신함명(古敎諸臣啣名)」 으로 이루어졌으며, 「수서」 와 「후발」에는 1746년 2월 17일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내편」은 심신(心身)을 위주로 한 내용이고, 「외편」은 감계(監戒)를 위주로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 책의 체재는 「수서(首序)」, 「내편(內篇)」, 「외편(外篇)」, 「소지(小識)」, 「고교제신함명(古敎諸臣啣名)」 으로 이루어졌으며, 「수서」 와 「후발」에는 1746년 2월 17일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내편」은 심신(心身)을 위주로 한 내용이고, 「외편」은 감계(監戒)를 위주로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 ||
영조는 「수서」에서 이 책이 평소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 지난 일을 생각하며 감흥이 있는 것[追慕而興感], 생각하여 하나라도 얻은 것[思慮而一得], 잘못했다가 문득 깨달은 것[過差而旋悟], 역사 기록을 보다가 반성한 것[看史而反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밝혔다. | 영조는 「수서」에서 이 책이 평소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 지난 일을 생각하며 감흥이 있는 것[追慕而興感], 생각하여 하나라도 얻은 것[思慮而一得], 잘못했다가 문득 깨달은 것[過差而旋悟], 역사 기록을 보다가 반성한 것[看史而反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밝혔다. | ||
또한 세자에게 보여 감계하려는 의도에서 저술했음을 밝히며, 영조 자신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신념과 사업이 세자에 의해 계승되기를 기대하였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70-71쪽.</REF> | 또한 세자에게 보여 감계하려는 의도에서 저술했음을 밝히며, 영조 자신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신념과 사업이 세자에 의해 계승되기를 기대하였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70-71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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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가 『[[자성편]]』을 쓸때 [[정재륜]](鄭載崙,1648~1723)의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을 참고했음을 알 수 있다. 정재륜은 [[효종]]의 다섯째 부마로 [[숙정공주]]의 남편이고, 『공사견문록』은 효종부터 경종까지 궁중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을 기록한 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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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서」는 영조가 직접 짓고 [[이철보]](李喆輔,1691~1775)가 글씨를 썼다. 특히 말미에 '(*옛한글)내 깊히 원량(元良)의 바라미 잇도라(*옛한글)'이라 한 것은 이글이 [[장조|장헌세자(사도세자)]] 에게 보여 감계를 주기 위한 것임을 알려준다.('원량'은 사도세자를 의미한다.)<ref>박용만, 「英祖 御製冊의 자료적 성격」, 『장서각』제11집, 2004, 11~13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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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제자성편언해』는 18세기 왕실에서 쓰인 국어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음운변화의 양상이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특징은 왕실자료가 지닌 관습적이고 규범적인 표기의 보수성을 반영하는 한편, 왕실/상류층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를 보여준다.<ref>김주필, 「영조 어제류 한글 필사본의 표기와 음운현상」, 『장서각』제11집, 2004, 57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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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단행본 | ||
| + | *# 조항범·김주필·황문환·박용만, 『(역주) 어제자성편:언해』,역락, 20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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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논문 | ||
| + | *#김문식, 「영조의 제왕학과 《御製自省編》」,『장서각』제27집, 2012 | ||
| + | *#조항범, 「영조 어제류 한글 필사본의 어휘론적 고찰」,『장서각』제11집, 2004 | ||
| + | |||
| + | *온라인 | ||
|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101 어제자성편언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
==주석== | ==주석== | ||
2017년 4월 1일 (토) 01:44 판
| 어제자성편언해 | |
| 한자명칭 | 御製自省編諺解 |
|---|---|
| 영문명칭 | King Yeongjo's compliation of selected passages from the classics and his own advice to the crown prince |
| 작자 | 영조 |
| 간행시기 | 1746년(영조22) |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 청구기호 | 4-4106 |
| 유형 | 고서 |
| 크기(세로×가로) | 37.6×24.2㎝ |
| 판본 | 필사본 |
| 수량 | 2冊 |
| 표기문자 | 한글, 한자 |
정의
영조가 왕세자를 감계하기 위해 저술한 책으로, 영조 자신이 임금으로 재위하는 동안 실행에 옮기지 못한 신념과 사업이 세자에 의해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역대 제왕의 사적 중 모범이 될 만한 내용을 간추려 편찬한 『자성편(自省編)』을 언해한 책이다.
내용
영조가 자신을 성찰하고 왕세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역대 제왕의 사적 중 모범이 될 만한 내용을 간추려 편찬한 『자성편(自省編)』을 언해한 책이다. 한문본은 1746년 문정전(文政殿)에서 2권 2책으로 편집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본래 한문본과 함께 간행하려 했던 초본(草本)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체가 정연하고 흘림이 없으며, 편집이 잘 되어 있고 표지 장정이 호화롭다. 언해본의 언해자 및 필사자, 시기 등은 알 수 없다. 책의 체재는 「수서(首序)」, 「내편(內篇)」, 「외편(外篇)」, 「소지(小識)」, 「고교제신함명(古敎諸臣啣名)」 으로 이루어졌으며, 「수서」 와 「후발」에는 1746년 2월 17일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내편」은 심신(心身)을 위주로 한 내용이고, 「외편」은 감계(監戒)를 위주로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영조는 「수서」에서 이 책이 평소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 지난 일을 생각하며 감흥이 있는 것[追慕而興感], 생각하여 하나라도 얻은 것[思慮而一得], 잘못했다가 문득 깨달은 것[過差而旋悟], 역사 기록을 보다가 반성한 것[看史而反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세자에게 보여 감계하려는 의도에서 저술했음을 밝히며, 영조 자신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신념과 사업이 세자에 의해 계승되기를 기대하였다. [1]
부연설명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가 『자성편』을 쓸때 정재륜(鄭載崙,1648~1723)의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을 참고했음을 알 수 있다. 정재륜은 효종의 다섯째 부마로 숙정공주의 남편이고, 『공사견문록』은 효종부터 경종까지 궁중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을 기록한 책이다.
「수서」는 영조가 직접 짓고 이철보(李喆輔,1691~1775)가 글씨를 썼다. 특히 말미에 '(*옛한글)내 깊히 원량(元良)의 바라미 잇도라(*옛한글)'이라 한 것은 이글이 장헌세자(사도세자) 에게 보여 감계를 주기 위한 것임을 알려준다.('원량'은 사도세자를 의미한다.)[2]
『어제자성편언해』는 18세기 왕실에서 쓰인 국어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음운변화의 양상이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특징은 왕실자료가 지닌 관습적이고 규범적인 표기의 보수성을 반영하는 한편, 왕실/상류층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를 보여준다.[3]
시각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 [1] 한글전시도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 [2] 한글전시도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 [3] 한글전시도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 [4] 한글전시도록
관련 항목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세종 | 찬주분류두시 | A는 B의 편찬을 명하였다 | 1443년 |
| 집현전 | 찬주분류두시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443년 |
| 찬주분류두시 | 어제자성편 언해 | A는 B의 모델이다 | |
| 성종 | 어제자성편 언해 | A는 B의 편찬을 명하였다 | 1481년 |
시간정보
| 시간정보 | 내용 |
|---|---|
| 1443년 | 세종이 찬주분류두시의 편찬을 명하였다. |
| 1443년 | 집현전이 찬주분류두시을 간행하였다. |
| 1481년 | 성종이 어제자성편 언해의 편찬을 명하였다 |
| 1482년 | 홍문관이 어제자성편 언해을 간행하였다. |
공간정보
| 위도 | 경도 | 내용 |
|---|---|---|
| 37.39197 | 127.054387 | 장서각에 어제자성편언해가 소장되어 있다. |
참고문헌
- 단행본
- 조항범·김주필·황문환·박용만, 『(역주) 어제자성편:언해』,역락, 2006
- 논문
- 김문식, 「영조의 제왕학과 《御製自省編》」,『장서각』제27집, 2012
- 조항범, 「영조 어제류 한글 필사본의 어휘론적 고찰」,『장서각』제11집, 2004
- 온라인
- '어제자성편언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