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임진왜란 3대 대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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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mode=packed caption="임진왜란 3대 대첩" heights=180px  style="float:cen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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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파일:김형구-한산대첩(이순신)-1975s.jpg|[[김형구-한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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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록화는 한반도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세밀한 필치로 담아내어, 우리 역사와 문화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 7년간의 항쟁을 다룬 다수의 민족기록화 작품들이 존재한다. 이 작품들 중 전쟁의 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준 3대 전투를 살펴보고, 그 경과와 의의를 알아본다.
파일:강대운-진주성싸움(김시민)-1975s.jpg|[[강대운-진주성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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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승우-행주대첩(권율)-1975s.jpg|[[오승우-행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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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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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구-한산대첩]]』, 일본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고 제해권을 장악, [[한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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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형구-한산대첩(이순신)-1975s.jpg | [[김형구-한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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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 장소 통영 한산대첩 전망대 02.jpg| 한산대첩전망대에서 바라본 한산도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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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 장소 통영 한산대첩 전망대 01.jpg| 한산대첩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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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 장소 통영 한산대첩 전망대 안내판 02.jpg| 한산대첩 해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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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이에 왜 수군은 용인 전투의 주역인 와키자카 하스하루(脇坂安治)가 전함 73척을 앞세워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또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ref>조성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1676 한산도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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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전라좌수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한 후,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388 한산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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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함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접하고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板屋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388 한산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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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넓은 한산 앞바다로 유인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싸움의 결과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ref>조성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1676 한산도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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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첩은 왜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하여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ref>조성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1676 한산도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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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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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운-진주성싸움]]』, 적의 예봉을 꺽고 호남 곡창지대를 보호, [[진주전투 | 진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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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강대운-진주성싸움(김시민)-1975s.jpg | [[강대운-진주성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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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 유적 진주성 김시민장군 전공비 01.jpg | 김시민장군 전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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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 유적 진주성 김시민장군상.jpg | 김시민장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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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난 곳으로 그만큼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진주는 경상도 일대를 관장하는 가장 큰 고을이었으며 고려시대부터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방어하는 기지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부산포를 시작으로 도성 한양까지 큰 저항없이 진격했던 왜군들은 점차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조선 의병들의 반격활동으로 후방에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조선 의병활동의 중심에 진주성이 있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55099 진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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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에서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한양으로 후퇴한 왜군은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고 호남지역으로 진출하여 안정적인 후방의 보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주성을 차지해야만 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55099 진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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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10월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3만여 명은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진주성]]에서는 [[김시민]]이 지휘하는 조선군 3천여 명이 혈전을 벌였고, [[곽재우]]·[[최강]]·[[이달]] 등의 의병부대는 성 밖에 진을 치고 왜군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6일간에 걸친 대접전 끝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퇴했으나 전투를 지휘한 [[김시민]]은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 싸움의 결과로 조선군은 경상우도를 보존하고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ref>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145&cid=42957&categoryId=42957 진주성전투]", 한국고중세사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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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우-행주대첩]]』, 적의 대군을 격퇴하여 전쟁의 흐름을 바꾸다, [[행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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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승우-행주대첩(권율)-1975s.jpg | 『[[오승우-행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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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 유적 고양 행주산성 행주대첩비.jpg | 행주대첩비<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Directory_Image.jsp?VdkVgwKey=13,00560000,31&imgfname=2016012515150302.JPG&dirname=history_site&photoname=%ED%96%89%EC%A3%BC%EB%8C%80%EC%B2%A9%EB%B9%84&photoid=3161769 행주산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검색』<sup>online</sup></online></html>.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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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 유적 고양 권율동상.jpg | 권율동상<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Directory_Image.jsp?VdkVgwKey=13,00560000,31&imgfname=1625407.jpg&dirname=history_site&photoname=%ED%96%89%EC%A3%BC%EC%82%B0%EC%84%B1&photoid=1625407  행주산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검색』<sup>online</sup></online></html>.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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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수원 독산성 | 독산성]](禿山城)에 머물렀다.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조방장 [[조경]]이 물색한[[행주산성]]에 집결시키고, [[조경]](趙儆)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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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하 병력 중 4,000명을 뽑아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는 금주(衿州:始興)에 주둔시켜 서을의 적을 견제하게 하였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江華), 충청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金浦)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823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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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 태세를 갖췄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859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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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울에 집결한 왜군은 벽제관(碧蹄館)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왜군은 [[배티전투]]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설욕하고 후방의 위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의하고,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지휘하에 3만여 명의 병력을 7개 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08&index_id=cp02081391&content_id=cp020813910001&search_left_menu=4 행주산성전투]", 문화원형 라이브러리<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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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새벽 왜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하여 여러 겹으로 성(城)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왜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823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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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ref> 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859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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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때문에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ref>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823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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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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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1676 한산도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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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388 한산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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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82%B0%EB%8F%84_%EB%8C%80%EC%B2%A9 한산도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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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55099 진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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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145&cid=42957&categoryId=42957 진주성전투]", 한국고중세사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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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823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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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859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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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08&index_id=cp02081391&content_id=cp020813910001&search_left_menu=4 행주산성전투]",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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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분류: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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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분류:기획기사]][[분류:민족/교열요청3]]

2017년 11월 2일 (목) 02:09 판

개요

민족기록화는 한반도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세밀한 필치로 담아내어, 우리 역사와 문화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 7년간의 항쟁을 다룬 다수의 민족기록화 작품들이 존재한다. 이 작품들 중 전쟁의 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준 3대 전투를 살펴보고, 그 경과와 의의를 알아본다.

내용

김형구-한산대첩』, 일본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고 제해권을 장악, 한산대첩

  1.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이에 왜 수군은 용인 전투의 주역인 와키자카 하스하루(脇坂安治)가 전함 73척을 앞세워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또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1]
  2. 왜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전라좌수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한 후,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였다.[2]
  3. 적함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접하고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板屋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하였다.[3]
  4. 적을 넓은 한산 앞바다로 유인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싸움의 결과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4]
  5. 이 대첩은 왜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하여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5]

내용

강대운-진주성싸움』, 적의 예봉을 꺽고 호남 곡창지대를 보호, 진주대첩

  1. 진주성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난 곳으로 그만큼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진주는 경상도 일대를 관장하는 가장 큰 고을이었으며 고려시대부터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방어하는 기지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부산포를 시작으로 도성 한양까지 큰 저항없이 진격했던 왜군들은 점차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조선 의병들의 반격활동으로 후방에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조선 의병활동의 중심에 진주성이 있었다.[6]
  2. 평양성에서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한양으로 후퇴한 왜군은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고 호남지역으로 진출하여 안정적인 후방의 보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주성을 차지해야만 했다.[7]
  3. 1592년 10월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3만여 명은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진주성에서는 김시민이 지휘하는 조선군 3천여 명이 혈전을 벌였고, 곽재우·최강·이달 등의 의병부대는 성 밖에 진을 치고 왜군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6일간에 걸친 대접전 끝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퇴했으나 전투를 지휘한 김시민은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 싸움의 결과로 조선군은 경상우도를 보존하고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8]

오승우-행주대첩』, 적의 대군을 격퇴하여 전쟁의 흐름을 바꾸다, 행주대첩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禿山城)에 머물렀다.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조방장 조경이 물색한행주산성에 집결시키고, 조경(趙儆)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다.
휘하 병력 중 4,000명을 뽑아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는 금주(衿州:始興)에 주둔시켜 서을의 적을 견제하게 하였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江華), 충청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金浦)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11]

  1.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 태세를 갖췄다.[12]
  2. 한편 서울에 집결한 왜군은 벽제관(碧蹄館)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왜군은 배티전투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설욕하고 후방의 위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의하고,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지휘하에 3만여 명의 병력을 7개 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13]
  3. 2월 12일 새벽 왜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하여 여러 겹으로 성(城)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왜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14]
  4. 명(明)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15]
  5. 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때문에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16]




주석

  1. 조성도, "한산도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산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3. "한산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4. 조성도, "한산도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조성도, "한산도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진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7. "진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8.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진주성전투",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9. "행주산성", 『문화재검색』online.문화재청.
  10. "행주산성", 『문화재검색』online.문화재청.
  11. "행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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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행주산성전투", 문화원형 라이브러리『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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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2.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진주성전투",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행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4. 이장희, "행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행주산성전투",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