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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의 왜군은 우리 군사의 후속 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모든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공격해왔다. [[조헌]]은 명령을 내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하고 힘껏 싸워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물리쳤으나, 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해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의병은 육박전을 벌여 한 명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순절했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다.<ref>김진봉,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820 금산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ref> | 성내의 왜군은 우리 군사의 후속 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모든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공격해왔다. [[조헌]]은 명령을 내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하고 힘껏 싸워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물리쳤으나, 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해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의병은 육박전을 벌여 한 명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순절했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다.<ref>김진봉,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820 금산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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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일 (월) 01:48 판
@ 일러스트 추가 예정
2차 금산전투(錦山戰鬪) | |
대표명칭 | 2차 금산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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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錦山戰鬪 |
이칭 | 2차 금산싸움 |
유형 | 전투 |
시대 | 조선 |
날짜 | 1592년 9월 23일-24일 |
관련인물 | 조헌, 영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관련장소 | 금산,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
관련유물유적 | 금산 종용사, 금산 칠백의총 |
목차
정의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9월 23일부터 9월 24일까지 의병장 조헌이 지휘한 의병이 왜군과 금산에서 싸운 전투.
내용
배경
9월 6일 청주전투에서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과 영규는 근왕[1]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충청도 아산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권유로, 때마침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 지방을 침범하려는 왜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로 돌아왔다.[2] 그러나 조헌이 전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순찰사(巡察使)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수가 700명으로 줄었다. 조헌은 관군의 협조를 얻지 못한 채 단독으로 700의사(義士)와 함께 금산으로 진격하였고, 영규의 승병과 합세하여 8월 18일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쳤다. [3]
경과
성내의 왜군은 우리 군사의 후속 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모든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공격해왔다. 조헌은 명령을 내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하고 힘껏 싸워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물리쳤으나, 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해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의병은 육박전을 벌여 한 명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순절했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다.[4]
결과 및 의의
2차 금산전투로 인하여 왜군도 큰 타격을 입어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하였다. 이로써 호남·호서 지방이 안전하게 되었으며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왜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박정량(朴廷亮)이 의사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였다. 후세에 이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 선비들이 매년 이에 시향을 받들어왔으며, 1971년 정부에서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금산전투 | 1차 금산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금산전투 | 2차 금산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금산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고경명 | 1차 금산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곽영 | 1차 금산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고인후 | 1차 금산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고경명 | 고인후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고경명 | 금산 종용사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고인후 | 금산 종용사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고경명 | 이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근왕(勤王) : 싸움에서 군사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일
- ↑ 김진봉, "금산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 - ↑ "금산싸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김진봉, "금산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 - ↑ 김진봉, "금산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유용한 정보
- 김진봉, "금산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
- 김진봉, "금산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