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홍의장군 곽재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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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92년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40평생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던 [[곽재우]]는 재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입고 백금으로 투구를 꾸미고 그 양편에 날개를 달아 백마를 타고 군사를 지휘하니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天降紅衣將軍」이라고 불렀다.<br/> | + | 1592년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40평생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던 [[곽재우]]는 재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입고 백금으로 투구를 꾸미고 그 양편에 날개를 달아 백마를 타고 군사를 지휘하니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天降紅衣將軍」이라고 불렀다. 물자가 부족했던 그의 부대는 관군이 도망가 비어있던 초계성(草溪城)으로 들어가 그곳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해 사용했는데,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등이 이런 행동을 오해해 그들을 토적(土賊- 지방에서 일어난 도둑 떼)으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의 해명으로 위기를 넘긴 곽재우 부대는 그 뒤 의령을 거점으로 현풍ㆍ영산(靈山. 지금 창녕)ㆍ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ref>[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10901 인물한국사, 곽재우, 네이버캐스트 온라인서비스 (2017년 2월 15일 확인)]</ref><br/> |
왜군의 선발대가 [[정암나루]]에 다다러 강을 건너기 위하여 건조한 곳을 가려 나무를 꽃아 행군로를 표시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곽재우는 밤을 이용하여 그것을 뽑아 진흙이 많은 곳에 꽃아 두었다. 부근에 군사를 매복하고 왜군을 기다려 새벽에 왜군의 대부대가 강을 건너자, 표지만 보고 건너다 진흙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였다.<br/> | 왜군의 선발대가 [[정암나루]]에 다다러 강을 건너기 위하여 건조한 곳을 가려 나무를 꽃아 행군로를 표시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곽재우는 밤을 이용하여 그것을 뽑아 진흙이 많은 곳에 꽃아 두었다. 부근에 군사를 매복하고 왜군을 기다려 새벽에 왜군의 대부대가 강을 건너자, 표지만 보고 건너다 진흙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였다.<br/> | ||
왼편으로 강을 건너는 왜군들이 매복한 의병들의 공격을 받아 전열이 흐트려 혼란스러운 상태로, 말을 탄 채 강에 떠내려 가거나 화살을 맞아 엎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 중앙에는 횃불을 든 휘하 장수가 의병들을 독려하고 있다. 하늘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고 왜군의 진영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 왼편으로 강을 건너는 왜군들이 매복한 의병들의 공격을 받아 전열이 흐트려 혼란스러운 상태로, 말을 탄 채 강에 떠내려 가거나 화살을 맞아 엎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 중앙에는 횃불을 든 휘하 장수가 의병들을 독려하고 있다. 하늘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고 왜군의 진영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
2017년 2월 15일 (수) 14:23 판
홍의장군 곽태우 | |
작가 | 김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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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연도 | 1976년 |
규격 | 300호(290.9x197cm) |
유형 | 군사,전쟁 |
분류 | 유화 |
소장처 | 전쟁기념관 |
개요
선조25년 5월(1592년), 임진왜란 시 정암진(鼎巖津: 현 경남 함안) 나루터에서 강을 건너오는 왜군을 섬멸하는 홍의장군 곽재우.
내용
1592년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40평생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던 곽재우는 재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입고 백금으로 투구를 꾸미고 그 양편에 날개를 달아 백마를 타고 군사를 지휘하니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天降紅衣將軍」이라고 불렀다. 물자가 부족했던 그의 부대는 관군이 도망가 비어있던 초계성(草溪城)으로 들어가 그곳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해 사용했는데,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등이 이런 행동을 오해해 그들을 토적(土賊- 지방에서 일어난 도둑 떼)으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의 해명으로 위기를 넘긴 곽재우 부대는 그 뒤 의령을 거점으로 현풍ㆍ영산(靈山. 지금 창녕)ㆍ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1]
왜군의 선발대가 정암나루에 다다러 강을 건너기 위하여 건조한 곳을 가려 나무를 꽃아 행군로를 표시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곽재우는 밤을 이용하여 그것을 뽑아 진흙이 많은 곳에 꽃아 두었다. 부근에 군사를 매복하고 왜군을 기다려 새벽에 왜군의 대부대가 강을 건너자, 표지만 보고 건너다 진흙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왼편으로 강을 건너는 왜군들이 매복한 의병들의 공격을 받아 전열이 흐트려 혼란스러운 상태로, 말을 탄 채 강에 떠내려 가거나 화살을 맞아 엎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 중앙에는 횃불을 든 휘하 장수가 의병들을 독려하고 있다. 하늘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고 왜군의 진영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왼편 아래의 의병은 상모장식이 달린 전립을 쓰고 왼손에는 장방형 방패를 등뒤에는 전통을 메고 있다. 오른손에 창을 들고 힘껏 강 건너편의 적을 향해 던지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그 옆의 웅크린 의병은 화살촉에 화약포를 부착한 불화살인 화전을 활시위에 메기고 있다. 또한 그 뒤의 의병은 언월도를 들고 있으며 그림 곳곳에서 명나라 군에 의해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전래된 삼지창(당파)이 보이는 등, 당시 의병의 무장수준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그림에서 곽재우는 令자 기치와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씌여진 깃발아래 갈색 말에 올라 칼을 뽑아 들고 의병들을 지휘하고 있다. 대부분의 의병들이 흰옷에 붉은 색 겉옷을 입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점이다.
관련 민족기록화
임진왜란 관련 작품
조선
추출정보
작품정보 연결망
관련항목
노드 | 관계 | 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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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의장군 곽재우 | ~에 의해 그려지다 | 김태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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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의장군 곽재우 | 제작연도 | 1976년 |
총무처 | 소장처 | 1979년 |
전쟁기념관 | 소장처 | 2016년 |
참고문헌
- 한국도서출판공사,『민족기록화, 구국위업편』,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