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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1일 (목) 17:27 판
@ 일러스트 삽입 예정 / 이미지 추가 예정
3차 평양전투(平壤戰鬪) | |
대표명칭 | 3차 평양전투 |
---|---|
한자표기 | 平壤戰鬪 |
이칭 | 3차 평양성 전투, 3차 평양성 싸움, |
유형 | 전투 |
시대 | 조선 |
날짜 | 1592년 9월 6일(음력 8월 1일) |
관련인물 | 김억추, 이일, 이원익, 김응서 |
관련유물유적 | 평양성 |
목차
정의
1592년(선조 25) 9월 6일(음력 8월 1일)에 평양에서 조선과 일본의 군대가 벌인 전투.
내용
도원수 김명원은 일본군이 평양에서 더 이상 북진하지 않고 약해졌다는 보고를 받고 이원익·이빈(李賓)에게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때 조방장(助防將) 김응서(金應瑞), 별장(別將) 박명현(朴命賢) 등이 용강(龍岡)·삼화(三和)·증산(甑山)·강서(江西) 등 바닷가 여러 고을의 군사 1만 여명을 거느리고 20여 둔으로 나누어 평양 서쪽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별장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입구를 점거했으며, 별장 임중량(林仲樑)은 2,000명을 거느리고 중화(中和)를 지켰다.[1]
세 길로 나누어 진격, 보통문(普通門) 밖까지 육박, 적의 선봉과 싸워 다소의 전과를 올렸으나 곧 적의 대군이 밀어닥쳐 패퇴하였다. 10월에는 다시 관군과 승군(僧軍)이, 11월에는 승군 단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계획으로만 그쳤다.[2]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평양전투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평양전투 | 평양성 | A는 B에서 일어났다 | A edm:happenedAt B |
평양전투 | 1차 평양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평양전투 | 2차 평양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평양전투 | 3차 평양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평양전투 | 4차 평양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고니시 유키나가 | 평양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억추 | 3차 평양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일 | 3차 평양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원익 | 3차 평양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응서 | 3차 평양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이장희, "평양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장희, "평양전투",
유용한 정보
-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국립중앙도서관』online . 온라인 참조: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평양성싸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평양성전투(2차)",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제3차 평양성 전투
제2차 평양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의 첫 패전 이후 일본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병들이 나서 중화군의 임중량과 윤봉, 차은진과 차은로 형제 등이 의병을 이끌고 진지를 세우고 일본군들과 싸웠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중화군을 대공격하여 의병이 대부분 전멸하고 윤봉이 전사하였다.
한편 평양성의 일본군 병력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한 조선 조정에서는 총 2만 명의 일본군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모아 단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결정했다.
순변사 이일이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며, 9월 6일(음력 8월 1일)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자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다. 이에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다. 조선군은 사기가 올라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으나 이때 성안에서 일본군 수천 명이 나와 공격하면서 결국 조선군은 둘로 갈라져 지휘가 마비되고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군사들을 흩여져 버리고 조선군은 왜군의 맹공격에 밀렸다. 남은 병력은 간신히 부산원 서쪽으로 후퇴했고 재빨리 후퇴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사상자를 줄였으나 임진왜란 전투 중 최초로 같은 장소에서 3번째로 전투에서 패한 기록을 남겼다.
이 중 김응서만이 적진에 돌격하여 700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에게 대패하였다.
3차 평양성 전투의 의미
명나라의 원군 이후 최초의 조선군 독자적인 작전이었다.
비록 대실패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조선군도 2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사용이 가능했다는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