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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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년([[고려 공민왕|공민왕]] 19)에 [[혜근|나옹 혜근(惠勤)]]이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에서 [[공부선|공부선(功夫選)]]을 개최하였는데 그가 참여하여 유일하게 인증을 받았다. 그는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의 주지를 하라는 왕명이 있을 것을 알아차리고 위봉산(圍鳳山)에 은둔하였다. 1378년 치악산(雉岳山)에서 연회암(宴晦菴)으로 돌아왔다가 왕의 청으로 [[개성 광암사|광암사(光巖寺)]]에서 3년을 지낸 뒤, 밤에 도망하여 원주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다시는 주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양평 용문사|용문사(龍門寺)]]·[[춘천 청평사|청평사(淸平寺)]]·치악산(雉岳山) 등을 편력하였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05 혼수]",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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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년([[고려 공민왕|공민왕]] 19)에 [[혜근|나옹 혜근(惠勤)]]이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에서 [[공부선|공부선(功夫選)]]을 개최하였는데 그가 참여하여 유일하게 인증을 받았다. 그는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의 주지를 하라는 왕명이 있을 것을 알아차리고 위봉산(圍鳳山)에 은둔하였다. 1378년 치악산(雉岳山)에서 연회암(宴晦菴)으로 돌아왔다가 왕의 청으로 [[개성 광암사|광암사(光巖寺)]]에서 3년을 지낸 뒤, 밤에 도망하여 원주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다시는 주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용문사(龍門寺)·[[춘천 청평사|청평사(淸平寺)]]·치악산(雉岳山) 등을 편력하였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05 혼수]",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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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 3년 경술 초가을인 7월에 [[고려 공민왕|공민왕]]이 회암사(檜巖寺)에 공부선장(功夫選場)을 베푸니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산문납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나옹(懶翁)스님에게 명하여 시험을 주관하게 하고, 왕도 친히 임도하였다. 나옹(懶翁)스님이 한 마디의 질문을 던지니 응시한 스님 중에 한 사람도 능히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를 지켜본 왕의 얼굴도 밝지 못하여 장차 파하려고 하는데 환암(幻庵)스님이 뒤늦게 고시장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 폐하에 서 있었다. 나옹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당문구인가."라 하니 곧 스님이 섬돌로 올라가 대답하되 "좌.우.중에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에 서 있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또 묻되 "어떤 것이 입문구인가."라 하니 곧 문안으로 들어가 말하되 "들어온 후가 도리어 들어오지 아니한 때와 같습니다."라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떤 것이 문내구인가."라 하니 대답하되 "내외가 본래 공하거늘 중간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나옹스님이 또 삼관으로써 묻되 "산이 어찌 산언저리에서 중지되었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높음을 만나면 곧 낮아지고 낮음을 만나면 곧 중지하기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묻되 "물이 어디에 일으면 개천이 되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대해의 물이 땅밑으로 흘러 개천이 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묻되 "밥을 어찌하여 쌀로 짓는 것인가."라 하니 대답하되 "만약 모래나 돌을 삶아서야 어찌 좋은 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 하니 나옹스님이 모두 옳다고 긍정하였다.
 
홍무 3년 경술 초가을인 7월에 [[고려 공민왕|공민왕]]이 회암사(檜巖寺)에 공부선장(功夫選場)을 베푸니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산문납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나옹(懶翁)스님에게 명하여 시험을 주관하게 하고, 왕도 친히 임도하였다. 나옹(懶翁)스님이 한 마디의 질문을 던지니 응시한 스님 중에 한 사람도 능히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를 지켜본 왕의 얼굴도 밝지 못하여 장차 파하려고 하는데 환암(幻庵)스님이 뒤늦게 고시장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 폐하에 서 있었다. 나옹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당문구인가."라 하니 곧 스님이 섬돌로 올라가 대답하되 "좌.우.중에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에 서 있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또 묻되 "어떤 것이 입문구인가."라 하니 곧 문안으로 들어가 말하되 "들어온 후가 도리어 들어오지 아니한 때와 같습니다."라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떤 것이 문내구인가."라 하니 대답하되 "내외가 본래 공하거늘 중간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나옹스님이 또 삼관으로써 묻되 "산이 어찌 산언저리에서 중지되었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높음을 만나면 곧 낮아지고 낮음을 만나면 곧 중지하기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묻되 "물이 어디에 일으면 개천이 되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대해의 물이 땅밑으로 흘러 개천이 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묻되 "밥을 어찌하여 쌀로 짓는 것인가."라 하니 대답하되 "만약 모래나 돌을 삶아서야 어찌 좋은 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 하니 나옹스님이 모두 옳다고 긍정하였다.

2017년 11월 6일 (월) 00:38 판

혼수(混修)
BHST Monk1.png
대표명칭 혼수
영문명칭 Honsu
한자 混修
생몰년 1320(충숙왕 7)-1392(태조 1)
시호 보각(普覺)
환암(幻菴)
혼수(混修)
탑호 편광(遍光)
무작(無作)
성씨 조(趙)
출신지 광주(廣州: 현재의 경기도 광주)
승탑비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혼수의 자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菴)이다. 혼수의 기록이 남아 있는 문집류에는 환노(幻老) 또는 환옹(幻翁)이라고도 지칭한 사례가 있다. 1320년(충숙왕 7) 3월 13일에 그의 아버지가 부임한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 용궁면(龍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헌부산랑 조숙령(풍양 조씨)이고 어머니 청주 경씨이다.[1] 아버지가 사냥 나갔다가 새끼를 품은 사슴을 만나 사냥을 그만 두고 돌아와 곧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린 그를 데리고 친가로 돌아왔다. 혼수는 어려서 몸이 약하여 병을 앓았는데 출가하면 건강하고 큰 스님이 될 것이라는 점술사의 예언에 따라 어머니의 추천으로 계송(繼松) 대선사에게 12세 출가한다.[2][3]

Quote-left.png 어느 날 아버지가 사냥을 나가 사슴 한 마리를 보았는데 사슴이 달아나면서 멈추고 되돌아보곤 하기를 거듭하였다. 활을 쏘려 하다가 이상하게 여겨 돌아보니 새끼가 어머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짐승들이 새끼를 염려하는 것이 사람과 어찌 다르랴' 하고 곧 사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몇 개월 후 병을 앓다가 용주(龍州,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의 임지에서 죽었다.

스님은 어려서 부터 몸이 약하여 항상 병을 앓았다. 점장이에게 물었더니 "이 아이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면 영원히 병을 앓지 않고 항상 건강하여 마침내 큰 스님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나이 12세가 지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르기를 "네가 태어났을 때 너의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사슴의 어미가 새끼를 염려하는 것을 보고 감득하여 사냥하는 것을 중지하였으니 이는 곧 네가 자인(慈仁)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도리를 이미 강보(襁褓, 어린아이를 업을 때 사용하는 포대기)의 시절부터 나타내 보인 것이니 하물며 점장이의 말도 그와 같음이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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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출가수행

혼수는 1341년(충혜왕 2)에 선시에 응시하여 상상과에 합격하였다. 이 때 고승 및 유생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이색과 가까이 지냈다. 29세인 1348년(충목왕 2) 가을에 이웃사람이 급사함을 보고 수도에 더욱 정진할 것을 맹서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장좌불와로 정진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어머니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하여 경산(京山, 지금의 경북 성주군)에 주석하며 어머니를 5-6년간 보살피고 어머니가 운명하자 『대자법화경(大字法華經)』을 사경(寫經)하여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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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기원(至正紀元) 신사(辛巳)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그리하여 유생과 고승들과의 교유(交遊)가 깊어져 날로 친숙하여졌다. 출가하기 전부터 항상 신명(身命)이 환화(幻化)와 같다고 무상함을 탄식하여 초연(超然)히 벗어나려고 명리(名利)의 굴레인 명강(名韁, 명예의 굴레)을 던져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건강했던 이웃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비감(悲感)에 잠겨 입산할 뜻을 굳혔던 것이다. 어머님께 하직하고 떠나려고 하던 날 밤 꿈에 태양이 스님의 얼굴을 곧바로 비추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깨고 나서 크게 기꺼워하여 곧바로 금강산(金剛山)으로 갔으니 1348년인 지정(至正) 8년 가을로써 스님의 나이 29세 때였다. 용맹정진으로 섭심(攝心)하여 혼매하지 않았으며 잠시도 눕지 않고 장좌불와(長座不臥)하면서 정진하여 공부가 날마다 증진하였다. 2년이 지난 후 어머니가 아들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찾아가 뵙고 경산(京山)에 주석하며 감히 먼곳으로 떠나지 못하고 5-6년을 지냈다. 그 후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명필을 청하여 대자법화경(大字法華經)을 사경(寫經)하여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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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6쪽.


혼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머물고 있는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찾아가 『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당시 재상 조쌍중(趙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 능엄경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다. 이 법회에서 공민왕이 그의 도를 듣고 회암사 주지를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금오산(金鼇山)을 거쳐 오대산의 신성암(神聖菴)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같은 산내의 고운암(孤雲菴)에 머물고 있는 나옹 혜근을 찾아가 자주 질의하고 입실을 허락받았다. 그로부터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상아불(象牙拂) 산형주장자(山形杖)를 신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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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사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찾아가 『능엄경(楞嚴經)』을 수학하여 깊이 그 골수(骨髓)를 얻었다. 당시 재상인 조쌍중(趙雙重)이 새로 휴휴암(休体菴)을 창건하고 스님을 초청하여 능엄경에 대한 요지를 강연케 하니 변재(辯才)가 청발(淸發)하여 법문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껍게 하였다.

(중략)

현륭(玄隆, 공민왕)이 스님의 도덕이 숭고함을 존경하여 회암사(檜巖寺) 주지를 맡으라고 청하였응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금오산(金鼇山)으로 들어갔다가 또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갔다. 신성암(神聖菴)에서 주석할 때 나옹(懶翁) 혜근화상(惠勤和尙)도 내산 고운암(孤雲菴)에 머물고 있었다. 서로 자주 만나 도요(道要)를 문답하였는데 나옹이 입실을 허락하고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상아불자(象牙拂)와 산형주장자(山形杖)를 신물(信物)로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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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6-47쪽.


활동

1370년(공민왕 19)에 나옹 혜근(惠勤)회암사(檜巖寺)에서 공부선(功夫選)을 개최하였는데 그가 참여하여 유일하게 인증을 받았다. 그는 회암사(檜巖寺)의 주지를 하라는 왕명이 있을 것을 알아차리고 위봉산(圍鳳山)에 은둔하였다. 1378년 치악산(雉岳山)에서 연회암(宴晦菴)으로 돌아왔다가 왕의 청으로 광암사(光巖寺)에서 3년을 지낸 뒤, 밤에 도망하여 원주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다시는 주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용문사(龍門寺)·청평사(淸平寺)·치악산(雉岳山) 등을 편력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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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 3년 경술 초가을인 7월에 공민왕이 회암사(檜巖寺)에 공부선장(功夫選場)을 베푸니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산문납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나옹(懶翁)스님에게 명하여 시험을 주관하게 하고, 왕도 친히 임도하였다. 나옹(懶翁)스님이 한 마디의 질문을 던지니 응시한 스님 중에 한 사람도 능히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를 지켜본 왕의 얼굴도 밝지 못하여 장차 파하려고 하는데 환암(幻庵)스님이 뒤늦게 고시장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 폐하에 서 있었다. 나옹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당문구인가."라 하니 곧 스님이 섬돌로 올라가 대답하되 "좌.우.중에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에 서 있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또 묻되 "어떤 것이 입문구인가."라 하니 곧 문안으로 들어가 말하되 "들어온 후가 도리어 들어오지 아니한 때와 같습니다."라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떤 것이 문내구인가."라 하니 대답하되 "내외가 본래 공하거늘 중간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나옹스님이 또 삼관으로써 묻되 "산이 어찌 산언저리에서 중지되었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높음을 만나면 곧 낮아지고 낮음을 만나면 곧 중지하기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묻되 "물이 어디에 일으면 개천이 되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대해의 물이 땅밑으로 흘러 개천이 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묻되 "밥을 어찌하여 쌀로 짓는 것인가."라 하니 대답하되 "만약 모래나 돌을 삶아서야 어찌 좋은 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 하니 나옹스님이 모두 옳다고 긍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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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8-49쪽.


1383년 4월 1일 왕이 어서·인장·법복·예폐(禮幣) 등을 연회암(宴晦菴)에 보내어 국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오불심종 흥자운비복국이생 묘화무궁도대선사 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렸으며, 충청북도 충주의 개천사(開天寺, 충주 정토사)에 상주하도록 하였다. 1384년 해적이 충주를 침범하자 왕의 청에 의하여 광암사(光巖寺)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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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년 2월 조정에서 구제(舊制)를 좇아 석문(釋門)의 명덕을 선택하여 사범으로 모시고자 의논하였는데 스님이 그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피하여 은둔하고자 하였다. 문인인 감로사장노(甘露長老)인 경관(慶觀)이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편하려는 계책일 뿐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임금께서 우리 불법을 존중하여 이 일을 하고자 하는 뜻이 심히 강성하오니 원하옵건대 스님께서는 불법을 위하여 지조를 약간 낮추시어 임금님의 뜻을 따르십시요."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그 해 4월 1일 갑술에 왕이 상신(相臣)인 우인열(禹仁烈) 등을 보내어 어서(御書)와 인장(印章)과 법복(法服)과 예폐(禮幣) 등을 받들고 스님의 처소인 연회암으로 가서 국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오불심종 흥자운비복국이생 묘화무궁도대선사 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라는 37자의 국사호를 바치고 충주의 개천사를 하산소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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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50-51쪽.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대장경을 인성(印成)하여 1391년(공양왕 3) 서운사(瑞雲寺)에 봉안하고 경회(慶會)를 베풀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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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주상께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스님과 함께 대장경(大藏經) 인출을 발원하여 신미년(공양왕 3, 1391) 가을에 이르러 장정(裝幀)과 검교(檢校)를 마친 후 서운사(瑞雲寺)에 안치하고 크게 회향법회를 가졌는데 공양군(恭讓君, 고려 공양왕)이 내신에게 명하여 향을 하사하고 스님을 청하여 증사(證師 : 법회(法會)를 증명할 임무를 맡은 법사(法師))로 모셨다. 그리고 임신년(조선 태조 1, 1392) 7월 우리 주상인 태조께서 혁명으로 국통을 열었으므로 스님이 축하를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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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53쪽.


입적

1392년(태조 1) 청룡사로 옮겼는데, 9월 18일 문인(門人)에게 유서를 쓰게 한 다음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경관(慶觀), 담원(湛圓), 소안(紹安), 만우(卍雨) 등이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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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1392년) 9월 18일 병신에 유서를 쓰도록 명하는 한편 또 문인(門人)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밤에 떠나니 주관을 불러 국사인을 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이르러 단정히 앉아 말하되 "나의 납제(臘除, 일생의 마지막, 죽음의 뜻)의 시간이 이미 이르렀으니 나는 마땅히 떠나리라"하고, 곧 임종게(臨終偈)를 설한 다음 조용히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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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54쪽.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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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황인규, 「幻庵 混修의 生涯와 佛敎史的 位置」, 『경주사학』 18, 경주사학회, 1999, 105쪽.
  2. 황인규, 「幻庵 混修의 生涯와 佛敎史的 位置」, 『경주사학』 18, 경주사학회, 1999, 105쪽.
  3. 김상현, "혼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상현, "혼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상현, "혼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김상현, "혼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