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9번째 줄: | 19번째 줄: | ||
=='''내용'''== | =='''내용'''== | ||
− | == | + | ===고부민란, 동학농민운동의 서막=== |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다.<br/> |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다.<br/> | ||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은 기회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였는데,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하여 주고도 추수기에 강제로 수세(收稅)하였다. 민란의 직접적인 불씨가 된 것은 만석보(萬石洑)의 개수문제에 따르는 수세징수사건에서 비롯되었다.<br/> |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은 기회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였는데,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하여 주고도 추수기에 강제로 수세(收稅)하였다. 민란의 직접적인 불씨가 된 것은 만석보(萬石洑)의 개수문제에 따르는 수세징수사건에서 비롯되었다.<br/> | ||
25번째 줄: | 25번째 줄: | ||
이듬해인 1894년 2월 10일 전봉준 등은 봉기하여 고부군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되었던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정부에서는 새로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샀다. | 이듬해인 1894년 2월 10일 전봉준 등은 봉기하여 고부군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되었던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정부에서는 새로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샀다. | ||
− | === | + | ===백산성 봉기=== |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였다.<br/> |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였다.<br/> | ||
이 창의문에 근방의 10여 읍에서 호응하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br/> | 이 창의문에 근방의 10여 읍에서 호응하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br/> | ||
전봉준은 같은 해 4월 말 고부·흥덕·고창·부안·금구·태인 등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김개남과 모의하여 고부 백산(白山)에 집결시켰다. 여기서 항전의 대오를 갖추게 된 후 전봉준이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總管領)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br/> | 전봉준은 같은 해 4월 말 고부·흥덕·고창·부안·금구·태인 등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김개남과 모의하여 고부 백산(白山)에 집결시켰다. 여기서 항전의 대오를 갖추게 된 후 전봉준이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總管領)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br/> | ||
− | 전봉준은 우선 창의의 뜻을 천명하는 4개 항의 | + | 전봉준은 우선 창의의 뜻을 천명하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을 선포하고 창의의 뜻을 밝히는 또 다른 격문을 작성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
− |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
56번째 줄: | 55번째 줄: | ||
|- | |- | ||
|[[집강소]]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집강소]]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4번째 줄: | 67번째 줄: | ||
#* 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7년 9월 9일 (토) 01:04 판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 |
대표명칭 | 동학농민운동 |
---|---|
한자표기 | 東學農民運動 |
이칭 | 동학운동, 동학농민혁명, 동학혁명 |
유형 | 농민운동 |
시대 | 조선 |
날짜 | 1894년(고종 31) |
관련인물 | 전봉준,손화중,김개남,손병희 |
관련단체 | 동학 |
관련장소 | 우금치, 황토현, 백산성 |
목차
정의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내용
고부민란, 동학농민운동의 서막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다.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은 기회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였는데,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하여 주고도 추수기에 강제로 수세(收稅)하였다. 민란의 직접적인 불씨가 된 것은 만석보(萬石洑)의 개수문제에 따르는 수세징수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이 새로 군수로 부임해 오자 동진강 하류에 필요하지도 않은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이를 이유로 농민들에게서 고율의 수세를 징수함으로써 700여 섬이나 착복하였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우선 억울한 사정을 민소(民訴)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봉준은 동학접주인 동지 20명과 함께 각 마을 집강(執綱)에게 보내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여 봉기를 맹약하였다.
이듬해인 1894년 2월 10일 전봉준 등은 봉기하여 고부군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되었던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정부에서는 새로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샀다.
백산성 봉기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였다.
이 창의문에 근방의 10여 읍에서 호응하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
전봉준은 같은 해 4월 말 고부·흥덕·고창·부안·금구·태인 등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김개남과 모의하여 고부 백산(白山)에 집결시켰다. 여기서 항전의 대오를 갖추게 된 후 전봉준이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總管領)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전봉준은 우선 창의의 뜻을 천명하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을 선포하고 창의의 뜻을 밝히는 또 다른 격문을 작성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전봉준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개남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손화중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동학농민운동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동학농민운동 | 2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1차 동학농민전쟁 | 고부민란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1차 동학농민전쟁 | 황토현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홍계훈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동학12개조폐정개혁안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집강소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