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서를 언해하여 백성의 목숨을 구하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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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해두창집요]]=== | ===[[언해두창집요]]=== |
2017년 9월 7일 (목) 15:58 판
목차
개요
2016 장서각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의 전시에서 언해된 의학서 7건이 소개되었다. 조선 전기에 가난한 백성들은 의원의 진료를 받기 어려웠으며 어려운 한문으로 된 의서를 읽지도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의서를 언해하여 보급합으로써 누구나 쉽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의료의 혁신이었다. 전염병, 출산, 식품, 종기 등 다양한 질병을 비롯항 침과 뜸과 같은 치료법까지 의료 전반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이외에도 구황을 이기는 방법, 말의 병과 여러가지 증상, 고아의 보호 등 한글로 번역된 여러 분야의 서적을 통해 백성의 삶의 질이 한층 나아졌다. [1]
내용
조선시대 의서 언해작업의 성과와 의의 : 의료의 대중화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의서는 대체로 중국의 의서를 기본으로 우리의 사정을 참고하여 다시 편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한자를 사용하는 전문서인 의서를 일반 백성이 접근할 수 없었다. 문자로 인해 접근 자체가 어려웠던 의료 현실에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모든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만든 획기적인 사건이였다.[2]
조선시대 의서 언해본의 편찬
조선 중종은 김순몽등에게 명하여 온역(溫疫)의 치료에 필요한 처방전을 모아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간행하였고, 동시에 한글로 언해하였다.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은 『구급이해방(救急易解方)』을 지어 부녀자나 아이들도 책을 보고 치료방법을 깨우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선조는 허준에게 명하여 한글로 된 의학서인 『언해태산집요』, 『언해두창집요』, 『언해구급방』 등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 언해본 의서들은 『[[동의보감]』편찬의 밑거름이 되었다. 왕실 여성들이 사용하기 위해 『임산예지법』과 『동의보감내경편언해』 등이 편찬되었고, 백성들의 한약 제조 및 복용 지침서인 『언해납약증치방』도 편찬되었다. 이렇게 조선시대 의서의 언해는 의료 대중화라는 하나의 혁신이었다. [3]
언해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요
태교신기언해
임산예지법
동의보감내경편언해
구급간이방언해
언해납약증치방
지식 관계망
중심요소
- 전시자료: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전시자료: 김주국의 편지
- 전시자료: 김광찬·김주국의 편지
- 전시자료: 학봉 행장 언해
- 전시자료: 여자초학
문맥요소
- Actor-인물: 김성일
- Actor-인물: 김주국
- Actor-인물: 김광찬
- Actor-인물: 김종수
- Concept-개념: 의성김씨
- Place-유적: 의성김씨 학봉종택 (3차원 가상현실 제공)
- Event-사건: 진주전투
- Object-문헌: 학봉 유서(김성일을 관찰사에 임명하는 선조 임금의 교서)
- Object-유물: 학봉 안경
- Object-유물: 학봉 패도
- Object-유물: 학봉 유서통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의서를 언해하여 백성의 목숨을 구하다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
의서를 언해하여 백성의 목숨을 구하다 | 학봉 행장 언해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
의서를 언해하여 백성의 목숨을 구하다 | 김주국의 편지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
의서를 언해하여 백성의 목숨을 구하다 | 김광찬·김주국의 편지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
의서를 언해하여 백성의 목숨을 구하다 | 여자초학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592년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가 작성되었다. |
1765년 | 김주국의 편지가 작성되었다. |
1765년-1767년 | 김광찬·김주국의 편지가 작성되었다. |
1770년 | 학봉 행장 언해가 작성되었다. |
1797년 | 여자초학이 작성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609771 | 128.669643 | 의서를 언해하여 백성의 목숨을 구하다은 의성김씨 학봉종택과 관련이 있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영상
『안동 학봉 김성일 종가: 의리와 충절의 400년』 저자 이해영 인터뷰(게시일: 2015.05.28.)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78쪽.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84쪽.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84쪽.
참고 자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김덕현, 『안동 선비마을, 열두 검제』(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 김미영, 『학봉 김성일, 충군애민의 삶을 살다』(예문서원, 2016)
- 김영조,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얼레빗, 2015)
- 윤천근, 『안동의 종가』(지식산업사, 2001)
- 이연자, 『천년의 전통과 맥을 이어가는 명문 종가 이야기』(컬처라인, 2004)
- 이해영, 『학봉 김성일의 생각과 삶』(한국국학진흥원, 2006)
- 이해영, 『의리와 충절의 400년, 안동 학봉 김성일 종가』(예문서원, 2011)
- 논문
- 권오영, 「학봉 김성일과 안동지역의 퇴계학맥」, 『한국의철학』제28집, 경북대학교퇴계연구소, 2000.
- 권오영, 「학봉 김성일의 학문성향과 역사의식」, 『민족문화』제25집, 한국고전번역원, 2002.
- 정상균, 「임진년 진주대첩과 학봉 김성일」, 『경남문화연구소보』제30호,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