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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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 ||
+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96-114쪽. | ||
+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19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7.1.31. 확인 | ||
=='''각주'''== | =='''각주'''== |
2017년 2월 22일 (수) 22:50 판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
대표명칭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
---|---|
한자 | 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이칭 |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 |
주소 |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1번지 보림사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158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01.21 |
찬자 | 김영(金穎) |
서자 |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
승려 | 체징 |
승탑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 |
|
정의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의 탑비.
탑비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화강석,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1] 선사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보물 제157호)과 함께 조성되었다.[2]
비문
비문은 체징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며, 도의(道儀)-염거(廉居)-체징으로 법맥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 남종선(南宗禪)을 전래하였을 때 신라 불교계에서 남종선을 배척하였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3]
처음 도의선사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를 가리킴.)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雪山: 지금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그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4] | ||
출처: |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薳)과 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 번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5]이라고 평한 바 있다.[6]
갤러리
- Borimsa stele.jpg
보림사 경내 탑비 위치
- Bojoseonsa.JPG
- SteleforMasterBojo gwibu.jpg
귀부
- SteleforMasterBojo isu.jpg
이수
- SteleforMasterBojo side.jpg
옆에서 본 탑비
- Borimsa stele rub.jpg
탑비 탁본[7]
관련항목
Node | Relation | No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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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를 위한 비이다 | 체징(體澄)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 | 는 -의 승탑이다 | 체징(體澄)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에 위치한다 |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지었다 | 김영(金穎)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썼다 |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새겼다 | 현창(賢暢)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에 포함된다 | 보물 |
참고문헌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96-114쪽.
-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7.1.31. 확인
각주
- ↑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 ↑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 주요 소장품 검색 상세정보에서 인용.
-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6-107쪽.
- ↑ "하나의 비에 두 사람의 글씨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었다"라는 뜻.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에서 인용.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번호: 덕수(德壽)-0057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