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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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효공왕|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와 '징성혜등(證聖慧燈)'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또한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나, 1150년([[고려 의종|의종]] 4)까지 비는 세워지지 못하였고, [[박인범]]이 지은 비문은 끝내 사장되었다.<ref>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6쪽, 주7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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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이 세상을 떠난 후에 [[신라 효공왕|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광양 옥룡사|옥룡사]]에 세워진 그의 탑을 '징성혜등(澄聖慧燈)'으로 명명(命名)하였다. 또한 [[박인범|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으나 돌에 새기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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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이 소식을 듣고 도탄(悼歎)하면서 특히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명(塔名)을 징성혜등(證聖慧燈)이라 추증하였다. 문인 홍적 등이 先師의 빛나는 행적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表狀을 올려 누구를 시켜 비문을 짓도록 하여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에 명하여 비문을 지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  
 
|효공왕이 소식을 듣고 도탄(悼歎)하면서 특히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명(塔名)을 징성혜등(證聖慧燈)이라 추증하였다. 문인 홍적 등이 先師의 빛나는 행적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表狀을 올려 누구를 시켜 비문을 짓도록 하여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에 명하여 비문을 지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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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은 [[고려 태조]]와의 관계에 의해 고려 후기까지 줄곧 추앙을 받았으며, [[고려 현종|현종]] 대에는 [[대선사|대선사(大禪師)]], [[고려 숙종|숙종]] 대에는 [[왕사|왕사(王師)]]로, [[고려 인종|인종]] 대에는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증되었다. 1150년([[고려 의종|의종]] 4)왕명으로 [[최유청]]이「선각국사비(先覺國師碑)」를 지었으며, 1172년([[고려 명종|명종]] 2) [[광양 옥룡사|옥룡사]]에 탑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1653년([[조선 효종|효종]] 4)에는 도선이 머물렀다고 전하는 [[영암 도갑사]]에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가 건립되었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01&contents_id=GC04400988 도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영암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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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려 현종|고려 현종]] [[대선사|대선사(大禪師)]], [[고려 숙종|숙종]] [[왕사|왕사(王師)]]로 추증하였고, [[고려 인종|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150년([[고려 의종|의종]] 4)에는 왕명으로 [[최유청|최유청(崔惟淸)]]이 글을 짓고 [[정서|정서(鄭叙)]]가 글씨를 쓴 비석을 개경(開京) [[개성 국청사|국청사(國淸寺)]]에 세웠다. 1172년([[고려 명종|명종]] 2)[[광양 옥룡사|옥룡사]]의 주지 [[지문|지문(志文)]]이 비석을 [[광양 옥룡사|옥룡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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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大禪師라는 법계를 追贈하였으며, 숙조(肅祖)는 王師로 추봉하고, 우리 聖考이신 효공대왕조에 이르러 열성조에 대한 위업을 크게 선양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건국공로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는 뜻으로, 드디어 선각국사로 책봉하고 사신을 本寺의 影堂에 보내 국사 추대의 고례행사(告禮行事)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의종 임금께서는 또 그 사적을 비에 새기도록 명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으니, 장하신지라, 왕조의 존경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현종이 大禪師라는 법계를 追贈하였으며, 숙조(肅祖)는 王師로 추봉하고, 우리 聖考이신 효공대왕조에 이르러 열성조에 대한 위업을 크게 선양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건국공로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는 뜻으로, 드디어 선각국사로 책봉하고 사신을 本寺의 影堂에 보내 국사 추대의 고례행사(告禮行事)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의종 임금께서는 또 그 사적을 비에 새기도록 명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으니, 장하신지라, 왕조의 존경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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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이미 비석에 새간 다음 해에 臣과 鄭叙와 함께 참소를 당하여 혹은 유배를 가거나, 혹은 공직에서 쫓겨났다. 朝士들이 모두 규탄하였으며, 臣들도 百喙으로 공격하여 반드시 死地에 놓여 원수의 배를 채워 주고자 하였다. 비록 도선국사의 사적이 臣의 賢과 不肖에 얽매이지 아니 하였으므로 한 마디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석이 마땅히 세워져야 할 것이나, 그 돌이 드디어 국청사의 문무(門廡)의 밑에서 20여년간 방치되어 먼지에 덮혀 쌓이고 흙이 묻어 부식되어 거의 비상한 功烈로 하여금 민멸(泯滅)하여 후세에 傳聞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성상폐하께서 즉위함에 이르러 난적을 잔제(剗除)하고 百度를 정돈하여, 유신 선정을 베풀었다. 국사의 법손인 운암사 주지 중대사 지문이 그 事訴로써 대사씨에 접수하여 드디어 교지를 받았다. 光陽縣貢을 불러 그 비석의 원석을 배에 실어 옥룡사로 보냈다. 임금께서 내시 양온(良醞) 서승(署承) 박봉균 등을 보내 공사를 감독케 하고, 대사 설호정 이양정에게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석공은 화엄사 대중을 불렀고, 역부는 광양과 구례 두 현에서 징발하였으며, 군인 감무원(軍人 監務員) 장사랑 위위주부( 將仕郞 衛尉主簿) 한언방과 장사랑 위위주부 강립서등이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그러나 실지 총감독은 주지 지문스님이 맡아 얼마 되지 않아 낙성하니, 三間의 비각이었다. 대정 12년 임진년 10월 19일에 수비(竪碑) 공사가 끝났는데, 구부가 산정(峻整)하고 계기(階基)가 견고하여 실로 천년·만년이 지나가도 전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 탑비를 보호할 塔殿인 堂直은 절 동북쪽 약 2백보 지점에 세웠으니, 참으로 상개(爽塏)한 위치이다. 지문이 또 임금께 고하여 이르기를 원하옵건대, 本朝 王의 국사 비문도 구식에 의하여 석배(石背)에 법손과 제자 중에 대덕 이상의 직명을 실어, 미래에 영원히 垂示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계사년 5월 29일 주청하여 臣에게 음기를 짓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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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9-4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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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일 (토) 19:58 판

도선(道詵)
대표명칭 도선
영문명칭 Doseon
한자 道詵
생몰년 827(흥덕왕 2)-898(효공왕 2)
시호 요공선사(了空禪師), 선각국사(先覺國師)
연기(烟起)
도선(道詵)
탑호 징성혜등(澄聖慧燈)
옥룡자(玉龍子), 옥룡(玉龍)
성씨 김씨(金氏), 최씨(崔氏)
출신지 영암(靈巖)
승탑비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정의

신라 말기의 승려

내용

도선과 두 개의 비문

도선과 관련된 비문은 두 가지가 전해져오고 있다.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靈巖 道岬寺 道詵國師ㆍ守眉禪師碑) - 1653년 건립, 비 현존.
  •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 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 - 1173년 건립, 비는 현존하지 않음, 『동문선(東文選)』을 통해 확인 가능.

가계와 탄생

도선(道詵)은 827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내력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태종 무열왕의 서얼손(庶孼孫)이라는 전승으로 보아 진골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1]

Quote-left.png 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 출신이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史事는 유실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태종대왕의 서얼손 이라고도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쪽.


탄생설화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강가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임신하였다고 한다.

Quote-left.png 어머니는 崔氏니 ...(중략)... 어머니가 겨울철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떠내려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임신하여 俊秀한 아들을 낳았으니, 마치 后稷의 어머니 姜嫄이 巨人의 발자취를 밟고 感心하여 임신한 후 태어난 것과 같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1-422쪽.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로,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나는 구슬 한 개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는데 그 후 태기가 있었고, 만삭이 되도록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고 한다.[2]

Quote-left.png 어머니는 姜氏니,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明珠 한 개를 건네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여 만삭이 되도록 오신채(五辛菜)와 누린내 나는 육류(肉類)는 일체 먹지 아니하고 오직 독경과 염불로써 佛事에 지극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쪽.


출가수행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은 월남사(月南寺)로 출가하여 불경을 배웠다.

Quote-left.png 일찍이 月南寺로 가서 佛經(貝葉)을 배웠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3쪽.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3]

Quote-left.png 려서 희희(嬉戱)하거나, 우는 때에도 그의 뜻은 부처님을 경외함이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모가 그는 반드시 불법을 담을 만한 그릇임을 알고, 마음으로 출가를 허락하기로 하였다. 15살이 되었을 때, 이미 영오(穎悟)하고 숙성할 뿐 아니라, 기술과 예술에까지 겸비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유산 화엄사에 나아가서 大經을 독습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미 大義를 통달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433쪽.


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23세가 되던 849년(문성왕 11)에는 혜철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4]

Quote-left.png 문성왕 8년 20살 때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교법을 여의고 스스로 靜慮하여야 할 것이어늘 어찌 능히 움직이지 않고 올올(兀兀)하게 문자에만 고수하고 있겠는가." 이때 혜철대사가 密印을 서당지장(西堂智藏) 禪師로부터 전해받고,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에서 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도 선문에 구의(摳衣)하여 제자가 되려고 청하였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알뜰히 지도하였다.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法이 없는 法을허중(虛中)에서 주고 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23살 때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미 一乘了義를 통달하고, 參學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3-434쪽.


활동

도선은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太白山)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5]

Quote-left.png 노을을 밟고 천석(泉石)을 완상하면서 유수(幽邃)한 곳과 명승지를 찾아 선지식을 친견하고 問法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때로는 운봉산밑 동굴에서 참선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과 같은 큰 바위 앞에 초막을 맺고 좌선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명칭이 널리 퍼져서 온 천하 사람들이 그의 도덕을 尊仰하였다. 신비한 기적이 많았으나,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아니한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4쪽.


도선은 863년(헌안왕 4) 37세의 나이로 희양현(曦陽縣: 현 전라남도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에 주석하여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또한 헌강왕(憲康王)의 초빙으로 궁궐에서 설법하였지만 수도의 번잡함을 싫어하여 얼마 후에 다시 옥룡사로 돌아왔다.[6]

Quote-left.png 희양현 백계산에 옛 절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옥룡사였다. 스님께서 遊歷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 경치가 幽勝함을 좋아하여 堂宇를 개수하고, 시원하게 여겨 이곳에서 정진하다가 임종할 곳으로 뜻을 굳히고, 연좌(宴坐)하여 망언하기를 무려 35년 동안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도덕을 흠모하여 마치 양고기가 있는 곳에 개미가 모여들 듯, 학인들이 사방으로부터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세수할 때에는 수건과 양치질할 물을 수발하며, 출입할 적에는 錫杖과 신발을 준비하는 등 정성껏 시봉하였다. 문하에 제자가 항상 수백명을 넘었다. 차별적인 모든 根機들에게 一雨로 널리 윤택하였으며, 목격(目擊) 현장에서 신비하게 密授하여 빈손으로 나아가서 가득히 채워서 돌아갔다. 헌강왕이 그의 높은 덕을 공경하여 사신을 보내 禁中으로 맞이하고 처음 보는 초면에 크게 기꺼워하여 禁中에 머물게 하고, 수시로 玄言과 妙道로써 임금의 마음을 開發토록 조언하였다. 얼마 후 시끄러운 경주가 싫어서 本寺로 돌아가도록 간청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4-436쪽.


입적

도선은 옥룡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입적을 예언한 후 898년(효공왕 2) 3월 10일에 향년 72세로 입적하였다.[7]

Quote-left.png 어느 날 홀연히 제자들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따라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따라가는 것은 진리의 상도이니, 어찌 오래도록 이 세상에 거할 수 있겠는가"하고 엄연히 입적하였으니, 때는 대당(大唐) 광화 원년(光化 元年) 3월 10일이었다. 향년은 72세이다. 사부대중들이 슬피 통곡하니 마치 사모하는 듯, 또는 넋이 빠진 바보와도 같았다. 드디어 神座를 옮겨 탑을 절 북쪽 언덕에 세웠으니, 유명을 준수한 것이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6쪽.


도선이 세상을 떠난 후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옥룡사에 세워진 그의 탑을 '징성혜등(澄聖慧燈)'으로 명명(命名)하였다. 또한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으나 돌에 새기지는 못했다.

Quote-left.png 효공왕이 소식을 듣고 도탄(悼歎)하면서 특히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명(塔名)을 징성혜등(證聖慧燈)이라 추증하였다. 문인 홍적 등이 先師의 빛나는 행적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表狀을 올려 누구를 시켜 비문을 짓도록 하여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에 명하여 비문을 지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6쪽.


이후 고려 현종대선사(大禪師), 숙종왕사(王師)로 추증하였고,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150년(의종 4)에는 왕명으로 최유청(崔惟淸)이 글을 짓고 정서(鄭叙)가 글씨를 쓴 비석을 개경(開京) 국청사(國淸寺)에 세웠다. 1172년(명종 2)에 옥룡사의 주지 지문(志文)이 비석을 옥룡사로 옮겼다.

Quote-left.png 현종이 大禪師라는 법계를 追贈하였으며, 숙조(肅祖)는 王師로 추봉하고, 우리 聖考이신 효공대왕조에 이르러 열성조에 대한 위업을 크게 선양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건국공로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는 뜻으로, 드디어 선각국사로 책봉하고 사신을 本寺의 影堂에 보내 국사 추대의 고례행사(告禮行事)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의종 임금께서는 또 그 사적을 비에 새기도록 명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으니, 장하신지라, 왕조의 존경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비문을 이미 비석에 새간 다음 해에 臣과 鄭叙와 함께 참소를 당하여 혹은 유배를 가거나, 혹은 공직에서 쫓겨났다. 朝士들이 모두 규탄하였으며, 臣들도 百喙으로 공격하여 반드시 死地에 놓여 원수의 배를 채워 주고자 하였다. 비록 도선국사의 사적이 臣의 賢과 不肖에 얽매이지 아니 하였으므로 한 마디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석이 마땅히 세워져야 할 것이나, 그 돌이 드디어 국청사의 문무(門廡)의 밑에서 20여년간 방치되어 먼지에 덮혀 쌓이고 흙이 묻어 부식되어 거의 비상한 功烈로 하여금 민멸(泯滅)하여 후세에 傳聞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성상폐하께서 즉위함에 이르러 난적을 잔제(剗除)하고 百度를 정돈하여, 유신 선정을 베풀었다. 국사의 법손인 운암사 주지 중대사 지문이 그 事訴로써 대사씨에 접수하여 드디어 교지를 받았다. 光陽縣貢을 불러 그 비석의 원석을 배에 실어 옥룡사로 보냈다. 임금께서 내시 양온(良醞) 서승(署承) 박봉균 등을 보내 공사를 감독케 하고, 대사 설호정 이양정에게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석공은 화엄사 대중을 불렀고, 역부는 광양과 구례 두 현에서 징발하였으며, 군인 감무원(軍人 監務員) 장사랑 위위주부( 將仕郞 衛尉主簿) 한언방과 장사랑 위위주부 강립서등이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그러나 실지 총감독은 주지 지문스님이 맡아 얼마 되지 않아 낙성하니, 三間의 비각이었다. 대정 12년 임진년 10월 19일에 수비(竪碑) 공사가 끝났는데, 구부가 산정(峻整)하고 계기(階基)가 견고하여 실로 천년·만년이 지나가도 전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 탑비를 보호할 塔殿인 堂直은 절 동북쪽 약 2백보 지점에 세웠으니, 참으로 상개(爽塏)한 위치이다. 지문이 또 임금께 고하여 이르기를 원하옵건대, 本朝 王의 국사 비문도 구식에 의하여 석배(石背)에 법손과 제자 중에 대덕 이상의 직명을 실어, 미래에 영원히 垂示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계사년 5월 29일 주청하여 臣에게 음기를 짓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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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9-4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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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주석

  1.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영숙,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의 조성배경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2, 한국문화사학회, 2009, 178쪽.
  3.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55쪽.
  •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22-448쪽.
  •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옥룡사선각국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도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