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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이 소식을 듣고 도탄(悼歎)하면서 특히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명(塔名)을 징성혜등(證聖慧燈)이라 추증하였다. 문인 홍적 등이 先師의 빛나는 행적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表狀을 올려 누구를 시켜 비문을 짓도록 하여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에 명하여 비문을 지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 | |효공왕이 소식을 듣고 도탄(悼歎)하면서 특히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명(塔名)을 징성혜등(證聖慧燈)이라 추증하였다. 문인 홍적 등이 先師의 빛나는 행적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表狀을 올려 누구를 시켜 비문을 짓도록 하여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에 명하여 비문을 지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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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후 [[고려 현종|고려 현종]] 때 [[대선사|대선사(大禪師)]], [[고려 숙종|숙종]] 때 [[왕사|왕사(王師)]]로 추증하였고, [[고려 인종|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150년([[고려 의종|의종]] 4)에는 왕명으로 [[최유청|최유청(崔惟淸)]]이 글을 짓고 [[정서|정서(鄭叙)]]가 글씨를 쓴 비석을 개경(開京) [[개성 국청사|국청사(國淸寺)]]에 세웠다. 1172년([[고려 명종|명종]] 2)에 [[광양 옥룡사|옥룡사]]의 주지 [[지문|지문(志文)]]이 비석을 [[광양 옥룡사|옥룡사]]로 옮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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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大禪師라는 법계를 追贈하였으며, 숙조(肅祖)는 王師로 추봉하고, 우리 聖考이신 효공대왕조에 이르러 열성조에 대한 위업을 크게 선양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건국공로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는 뜻으로, 드디어 선각국사로 책봉하고 사신을 本寺의 影堂에 보내 국사 추대의 고례행사(告禮行事)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의종 임금께서는 또 그 사적을 비에 새기도록 명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으니, 장하신지라, 왕조의 존경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 |현종이 大禪師라는 법계를 追贈하였으며, 숙조(肅祖)는 王師로 추봉하고, 우리 聖考이신 효공대왕조에 이르러 열성조에 대한 위업을 크게 선양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건국공로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는 뜻으로, 드디어 선각국사로 책봉하고 사신을 本寺의 影堂에 보내 국사 추대의 고례행사(告禮行事)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의종 임금께서는 또 그 사적을 비에 새기도록 명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으니, 장하신지라, 왕조의 존경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 ||
− | |출처=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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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문을 이미 비석에 새간 다음 해에 臣과 鄭叙와 함께 참소를 당하여 혹은 유배를 가거나, 혹은 공직에서 쫓겨났다. 朝士들이 모두 규탄하였으며, 臣들도 百喙으로 공격하여 반드시 死地에 놓여 원수의 배를 채워 주고자 하였다. 비록 도선국사의 사적이 臣의 賢과 不肖에 얽매이지 아니 하였으므로 한 마디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석이 마땅히 세워져야 할 것이나, 그 돌이 드디어 국청사의 문무(門廡)의 밑에서 20여년간 방치되어 먼지에 덮혀 쌓이고 흙이 묻어 부식되어 거의 비상한 功烈로 하여금 민멸(泯滅)하여 후세에 傳聞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성상폐하께서 즉위함에 이르러 난적을 잔제(剗除)하고 百度를 정돈하여, 유신 선정을 베풀었다. 국사의 법손인 운암사 주지 중대사 지문이 그 事訴로써 대사씨에 접수하여 드디어 교지를 받았다. 光陽縣貢을 불러 그 비석의 원석을 배에 실어 옥룡사로 보냈다. 임금께서 내시 양온(良醞) 서승(署承) 박봉균 등을 보내 공사를 감독케 하고, 대사 설호정 이양정에게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석공은 화엄사 대중을 불렀고, 역부는 광양과 구례 두 현에서 징발하였으며, 군인 감무원(軍人 監務員) 장사랑 위위주부( 將仕郞 衛尉主簿) 한언방과 장사랑 위위주부 강립서등이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그러나 실지 총감독은 주지 지문스님이 맡아 얼마 되지 않아 낙성하니, 三間의 비각이었다. 대정 12년 임진년 10월 19일에 수비(竪碑) 공사가 끝났는데, 구부가 산정(峻整)하고 계기(階基)가 견고하여 실로 천년·만년이 지나가도 전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 탑비를 보호할 塔殿인 堂直은 절 동북쪽 약 2백보 지점에 세웠으니, 참으로 상개(爽塏)한 위치이다. 지문이 또 임금께 고하여 이르기를 원하옵건대, 本朝 王의 국사 비문도 구식에 의하여 석배(石背)에 법손과 제자 중에 대덕 이상의 직명을 실어, 미래에 영원히 垂示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계사년 5월 29일 주청하여 臣에게 음기를 짓도록 명하였다. | ||
+ | |출처=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9-44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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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일 (토) 19:58 판
도선(道詵) | |
대표명칭 | 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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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Doseon |
한자 | 道詵 |
생몰년 | 827(흥덕왕 2)-898(효공왕 2) |
시호 | 요공선사(了空禪師), 선각국사(先覺國師) |
호 | 연기(烟起) |
휘 | 도선(道詵) |
탑호 | 징성혜등(澄聖慧燈) |
자 | 옥룡자(玉龍子), 옥룡(玉龍) |
성씨 | 김씨(金氏), 최씨(崔氏) |
출신지 | 영암(靈巖) |
승탑비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
목차
정의
신라 말기의 승려
내용
도선과 두 개의 비문
도선과 관련된 비문은 두 가지가 전해져오고 있다.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靈巖 道岬寺 道詵國師ㆍ守眉禪師碑) - 1653년 건립, 비 현존.
-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 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 - 1173년 건립, 비는 현존하지 않음, 『동문선(東文選)』을 통해 확인 가능.
가계와 탄생
도선(道詵)은 827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내력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태종 무열왕의 서얼손(庶孼孫)이라는 전승으로 보아 진골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1]
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 출신이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史事는 유실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태종대왕의 서얼손 이라고도 하였다. | ||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쪽. |
탄생설화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강가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임신하였다고 한다.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로,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나는 구슬 한 개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는데 그 후 태기가 있었고, 만삭이 되도록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고 한다.[2]
출가수행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은 월남사(月南寺)로 출가하여 불경을 배웠다.
일찍이 月南寺로 가서 佛經(貝葉)을 배웠다. | ||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3쪽. |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에 따르면, 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3]
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23세가 되던 849년(문성왕 11)에는 혜철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4]
활동
도선은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太白山)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5]
도선은 863년(헌안왕 4) 37세의 나이로 희양현(曦陽縣: 현 전라남도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에 주석하여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또한 헌강왕(憲康王)의 초빙으로 궁궐에서 설법하였지만 수도의 번잡함을 싫어하여 얼마 후에 다시 옥룡사로 돌아왔다.[6]
입적
도선은 옥룡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입적을 예언한 후 898년(효공왕 2) 3월 10일에 향년 72세로 입적하였다.[7]
도선이 세상을 떠난 후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옥룡사에 세워진 그의 탑을 '징성혜등(澄聖慧燈)'으로 명명(命名)하였다. 또한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으나 돌에 새기지는 못했다.
이후 고려 현종 때 대선사(大禪師), 숙종 때 왕사(王師)로 추증하였고,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150년(의종 4)에는 왕명으로 최유청(崔惟淸)이 글을 짓고 정서(鄭叙)가 글씨를 쓴 비석을 개경(開京) 국청사(國淸寺)에 세웠다. 1172년(명종 2)에 옥룡사의 주지 지문(志文)이 비석을 옥룡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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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숙,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의 조성배경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2, 한국문화사학회, 2009, 178쪽.
-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55쪽.
-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22-448쪽.
-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옥룡사선각국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도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