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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년중(統和年中)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 다능(多能)을 비루(鄙陋)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 통화년중(統和年中)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 다능(多能)을 비루(鄙陋)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 ||
대중상부(大中祥符) 10년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란 법호를 증사(贈賜)받았고, 천희(天禧) 5년 호경(鎬京) 중흥사(重興寺)에서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국사께서 법을 설하시니, 그 법의 혜택이 화택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청량(淸凉)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비의 등불을 혼구(昏衢)의 밤거리에 비추어 축건(竺乾)의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깨닫게 하였다. 국사가 매일 한 번씩 기자(箕子)의 고도(古都)를 일컬으면 대중은 세 번씩 창송하였다. 그 후 기숙(耆宿)인 선공(先公)의 사회사소(社會詞疏)가 문리(文理)가 맞지 아니함을 보고 고쳐 지어주면서 (결락) 도(道). 지만적(枝蔓的)인 부사(浮辭)는 잘라 버렸다.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게 되었으니, 혜거(惠璩)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 담빙(曇憑)의 음운학(音韻學)의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연(遒姸)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그를 적대(的對)할 수 있겠는가! 태평년중(太平年中)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진정(進呈)하고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란 법호를 올리고는 수다사(水多寺)를 맡도록 하였다. 태평(太平) 10년에 이르러 현종이 칙명으로 해안사(海安寺)로 이주하도록 앙청(仰請)하였다. | 대중상부(大中祥符) 10년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란 법호를 증사(贈賜)받았고, 천희(天禧) 5년 호경(鎬京) 중흥사(重興寺)에서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국사께서 법을 설하시니, 그 법의 혜택이 화택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청량(淸凉)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비의 등불을 혼구(昏衢)의 밤거리에 비추어 축건(竺乾)의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깨닫게 하였다. 국사가 매일 한 번씩 기자(箕子)의 고도(古都)를 일컬으면 대중은 세 번씩 창송하였다. 그 후 기숙(耆宿)인 선공(先公)의 사회사소(社會詞疏)가 문리(文理)가 맞지 아니함을 보고 고쳐 지어주면서 (결락) 도(道). 지만적(枝蔓的)인 부사(浮辭)는 잘라 버렸다.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게 되었으니, 혜거(惠璩)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 담빙(曇憑)의 음운학(音韻學)의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연(遒姸)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그를 적대(的對)할 수 있겠는가! 태평년중(太平年中)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진정(進呈)하고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란 법호를 올리고는 수다사(水多寺)를 맡도록 하였다. 태평(太平) 10년에 이르러 현종이 칙명으로 해안사(海安寺)로 이주하도록 앙청(仰請)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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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종 때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가 곧 수좌(首座)가 되었고, 1045년(정종 11) 승통(僧統)이 되었다. 1046년(문종 1) 궁중에 초청받아 유심묘의(唯心妙義)를 강의하고, 이듬해 이자연(李子淵)의 제5자 소현(韶顯)을 출가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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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종(悳宗)이 즉위하여서는 보다 더욱 존중히 모시는 한편 특별히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호를 수정(授呈)하고 아울러 마납(磨衲)으로 만든 법복 한 벌을 증사(贈賜)하였으며, ‘탐현도원(‘探玄道源)’이라는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않아 수좌(首座)의 법호를 올리고 겸하여 마납(磨衲) 복전의(福田衣) 한 상자를 하사하였다. (결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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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중(宮中)의 구중(九重)에서부의(負扆)하고 있는 임금께서 친히 상보(象步)하는 용상대덕(龍象大德) 스님들을 영접한 백고좌(百高座)는 모두 용문(龍門)을 뛰어넘는 오도견성(悟道見性)한 도인들이었다. 담수(曇邃) 스님은 북좌(北座)에서 정통(精通)하였음을 부끄러워 했고, 승철대사(僧徹大師)는 편독(篇牘)과 시부(詩賦)에 뛰어나 낙필성장(落筆成章)하는 문호(文豪)이므로 많은 대덕(大德)들을 제치고 왕으로부터 총석(寵錫)받은 것을 사양할 정도였다. 그리고 중희년중(重熙年中)에 거듭 다시 ‘구행료성도수(具行了性導首)’라는 법호를 첨가(添加)받았다. 또 기원(祇園)의 적손(嫡孫)이니 이는 오직 불교가 중흥할 인유(因由)인 것이다. 척리(戚里)의 신동(神童)들이 예문(禮聞)을 거치지 아니하고 와서 수학하였다. 이로써 작고(作故)하신 수대사(守大師)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중서령(中書令)을 추증(追贈)받은 장사공(章私公) 이씨(李氏)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드디어 다섯째 아들을 허락하여 그로 하여금 락발(落)하고 정성을 다하여 국사에게 구의(摳衣)하고 신족(神足)이 되어 복근(服勤)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직접 찾아가서 친견하고 찬앙(讚仰)하였으니, 그 분이 누구인가? 지금의 금산사(金山寺) 주지로 있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소현(韶顯)이 바로 그 스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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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4년 현화사(玄化寺)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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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희(重熙) 23년 남녀월(南呂月)에 성칙(聖勅)을 내려 현화사(玄化寺)로 이석(移錫)케 하므로 국사는 고사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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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도(宸圖)께서 정재(淨財)를 기울여 현화사(玄化寺)의 보수공사에 필요한 공사비를 국가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개필(愷筆)을 불러 수용(睟容)의 탱화를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종(鳧鍾)을 주조하며, 일체법구(一切法具)를 마련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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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6년 왕사(王師)가 되고, 1058년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ref></ref>이때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은 왕사로 책봉되었다. 1067년 은퇴하여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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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하여 그 해 11월 4일 대가(大駕)가 내제석원(內帝釋院)으로 행행(行幸)하여 예배(禮拜)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가(御駕)에 동재(同載)하고 다녔으니, 마치 강승회(康僧會) 스님이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어가(御駕)에 동승하고 다녔던 것은 모두 스님의 하풍(下風)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녕(淸寧) 3년에 이르러 ‘융소(融炤)’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4년 5월 초하루에 임금께서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코자 하여 친서를 보내 삼청(三請)하였다. 그리하여 그 달 19일 왕이 금가(金駕)를 준비해 봉은사(奉恩寺)로 행행(幸行)하여 우리 해린(海鱗) 스님을 국사로 봉하고,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을 왕사(王)로 책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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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옹(咸雍) 3년 2월 일에 국사께서 법천사(法泉寺)에 돌아가 안주(安住)코자 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모치(暮齒)의 탄식을 일으키며, 누차 임금께 사퇴(辭退)할 것을 고진(告陳)하여 세번이나 거듭 수두(需頭)의 주청(奏請)을 올려 간절한 사의(辭意)가 확고함을 알렸다. 문종은 하는 수없이 윤허(允許)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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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7일 (일) 15:59 판
해린(海麟) | |
대표명칭 | 해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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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麟 |
생몰년 | 984년(성종 3)-1067년(문종21) |
시호 | 지광(智光) |
휘 | 해린(海麟) |
탑호 | 현묘(玄妙) |
자 | 거룡(巨龍) |
성씨 | 원씨(元氏) |
속명 | 수몽(水夢) |
출신지 | 강원 원주 |
승탑 |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
승탑비 |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출가수행
이수겸(李守謙)에게 수업하다가 출가의 뜻을 품고 법천사(法泉寺)관웅(寬雄)을 찾아가 수업하였다. 관웅을 따라 상경, 개경해안사(海安寺)준광(俊光)의 제자가 되었다.
관웅에게 유식학(唯識學)을 수업하였는데, 해린은 관웅이 지어준 법호이다. 999년(목종 2)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001년에는 숭교사(崇敎寺)의 개창과 함께 명성을 얻게 되었다.
활동
자운사(慈雲寺)의 법회에 참석한 뒤, 관웅이 있던 법천사로 옮겨 수업하였다. 1004년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된 대선(大選)에 급제, 대덕(大德)이 되었다.
1011년(현종 2)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던 중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그 해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평양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1030년 다시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
덕종 때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가 곧 수좌(首座)가 되었고, 1045년(정종 11) 승통(僧統)이 되었다. 1046년(문종 1) 궁중에 초청받아 유심묘의(唯心妙義)를 강의하고, 이듬해 이자연(李子淵)의 제5자 소현(韶顯)을 출가시켰다.
1054년 현화사(玄化寺)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
1056년 왕사(王師)가 되고, 1058년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름이 없는 ref 태그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이때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은 왕사로 책봉되었다. 1067년 은퇴하여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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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남윤, 「고려 전기의 법상종과 해린」, 『강원불교사연구』, 소화, 1996.
- 한국불교연구원, 「고려시대의 원주불교」,『원주 불교와 유적』, 원주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