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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3일 (수) 23:12 판
승정원(承政院) | |
대표명칭 | 승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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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承政院 |
이칭 | 정원(政院)·후원(喉院)·은대(銀臺)·대언사(代言司) |
유형 | 관청, 제도 |
창립시대 | 조선 |
창립일 | 1400년 04월 |
해체일 | 1894년 |
정의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1]
내용
시대별 명칭 변화
1392년(태조 1) 7월에 반포된 관제에 의하면 원래 왕명출납의 일은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중추원의 중요 업무 중 하나였는데, 이 때 그 속아문으로 승지방을 설치하였다. 승지방은 왕명 출납의 실무를 맡았고, 그 장관으로 도승지를 두어 정3품으로 하였다. 물론, 이 때의 관제에 의하면 중추원은 왕명 출납 이외에 군기(軍機)도 관장하는 강력한 기구였다. 그러나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정권을 장악하자, 먼저 사병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1400년(정종 2) 4월 중추원의 기능을 축소, 분할하였다. 군기의 사무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이관하고, 왕명 출납을 위하여 승지방을 승정원으로 독립시켰으며, 1401년(태종 1) 의흥삼군부가 승추부(承樞府)로 개편되면서 승정원의 기능도 여기에 귀속되었고, 그 명칭도 대언사(代言司)로 바뀌었다. 1405년에 육조 강화책의 하나로 승추부가 병조에 흡수되면서 대언사는 승정원으로 다시 개편되어 독립된 기구로 부활하였다. 그 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이후 승선원(承宣院)으로 개칭될 때까지 같은 이름으로 존속하였다. [2]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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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 어제계주윤음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승정원 | 규장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승정원 | 학봉 유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승정원 | 예문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사료
- 『승정원일기』
더 읽을거리
- 논문
- 홍순민, 「조선 후기 승정원의 직제와 공간 구조」, 『규장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규장각), Vol.49 No.- [2016], 1-42쪽.
- 이동희, 「朝鮮初期 承政院의 政治的 役割 硏究」, 전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