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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둔다.<ref>서원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6501 이현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둔다.<ref>서원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6501 이현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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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는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으로, 이황(李滉), 황준량(黃俊良) 등과 교유했으며 고향에 돌아와서는 시를 지으며 한가롭게 보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效嚬歌)」·「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문학사에서 [[강호문학]]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ref>서원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6501 이현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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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는 [[홍귀달 |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으로, [[이황 | 이황(李滉)]], [[황준량 | 황준량(黃俊良)]] 등과 교유했으며 고향에 돌아와서는 시를 지으며 한가롭게 보냈다. 저서로는 [[농암집 |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 | 「어부가(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效嚬歌)」·「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문학사에서 [[강호문학]]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ref>서원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6501 이현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대표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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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가(聾巖歌)
 
*농암가(聾巖歌)

2017년 9월 1일 (금) 20:15 판

이현보(李賢輔)
대표명칭 이현보
한자표기 李賢輔
본관 영천(永川)
시호 효절(孝節)
농암(聾巖), 설빈옹(雪鬢翁)
비중(菲仲)
이흠(李欽)


정의

이현보(1467∼1555)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인이다.

내용

생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菲仲),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鬢翁). 예안 출신. 아버지는 참찬 이흠(李欽)이다. 1612년(광해군 4)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됐다가 1700년(숙종 26)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됐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1]

관직활동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둔다.[2]

교유 및 저작활동

이현보는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으로, 이황(李滉), 황준량(黃俊良) 등과 교유했으며 고향에 돌아와서는 시를 지으며 한가롭게 보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效嚬歌)」·「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문학사에서 강호문학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3]

대표 시가

  • 농암가(聾巖歌)

시조(時調). 작자가 만년에 고향인 경북 안동군 도산면에 있는 농암이란 바위 위에 올라가 읊은 시조이다.[4]

  • 어부가(漁父歌)

십이가사(十二歌詞)의 하나. 고려 때부터 전해 오던 장가(長歌) 12장을 9장으로 개작한 것이다. 여음을 붙여 한장씩 잊달아 나가는 분장체(分章體)의 노래이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현보 강호문학 A는 B에 포함된다
윤서도 강호문학 A는 B에 포함된다

주석

  1. 서원섭, "이현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서원섭, "이현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서원섭, "이현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응백 외,『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이현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이응백 외,『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이현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유경, 「농암 이현보의 국문시가와 우리말로 노래하기의 전통」, 『열상고전연구』Vol.38, 열상고전연구회, 2013.
    • 성호경, 「聾巖 李賢輔의 삶과 시가」, 『진단학보』, 2002.
    • 최은주, 「愛日堂具慶帖』을 통해 본 聾巖 李賢輔의 문화 활동」, 『대동한문학』vol.45, 대동한문학회, 2015
  • 단행본
    • 이현보, 『때때옷의 선비 : 농암 이현보』,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