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중화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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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의 평면은 인정전과 비슷한 정면 5칸(61.4척), 측면 4칸(58척)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고, 넓은 이중의 월대 위에 높직한 초석을 놓아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월대에는 석계가 마련되어 있고, 석계 한가운데에 답도를 놓아 쌍용을 새겨놓았으며, 각 층마다 석계 모서리에는 석수를 조각해 놓았다. 고주와 창방에는 낙양각(落陽刻)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건물 내·외부 사이의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언제나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의 다포식 구성을 하고 있으며, 중화전에서 사용된 공포 형태는 외부에 쇠서를 달고 있는 운기당초문으로, 이것은 초각형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후기 다포의 변화에서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특히 궁궐건축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어놓고 토수(吐首)를 끼웠다. 단청은 은은한 채색의 모루단청이고 광창과 꽃살분합문을 달아 위관(偉觀)을 돋우었다. 건물의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두 마리를 조각으로 장식하여 건물의 위상을 높였다.<ref>김왕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366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중화전의 평면은 인정전과 비슷한 정면 5칸(61.4척), 측면 4칸(58척)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고, 넓은 이중의 월대 위에 높직한 초석을 놓아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월대에는 석계가 마련되어 있고, 석계 한가운데에 답도를 놓아 쌍용을 새겨놓았으며, 각 층마다 석계 모서리에는 석수를 조각해 놓았다. 고주와 창방에는 낙양각(落陽刻)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건물 내·외부 사이의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언제나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의 다포식 구성을 하고 있으며, 중화전에서 사용된 공포 형태는 외부에 쇠서를 달고 있는 운기당초문으로, 이것은 초각형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후기 다포의 변화에서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특히 궁궐건축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어놓고 토수(吐首)를 끼웠다. 단청은 은은한 채색의 모루단청이고 광창과 꽃살분합문을 달아 위관(偉觀)을 돋우었다. 건물의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두 마리를 조각으로 장식하여 건물의 위상을 높였다.<ref>김왕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366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2017년 8월 22일 (화) 17:35 판
德壽宮 中和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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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德壽宮 中和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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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유적건조물,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시대 | 조선 |
지정번호 | 보물 제819호 |
지정일 | 1985.01.08 |
정의
중화전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 내부의 건물이다.
내용
보물 제819호.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왕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으로 19~20세기 궁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1]
지식 관계망
설립경위
- 조선 중, 후기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서북으로 피난하던 선조가 환도하여 이곳에서 정무를 봄에 따라 행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1611년(광해군 3)에 경운궁(慶運宮)이란 정식 명칭이 붙여졌다.[2]
- 대한제국기
경운궁의 정전으로 초기에는 즉조당(卽祚堂)이 사용되었는데 1897년에 이 전각의 이름을 태극전(太極殿)이라 고쳤다. 대한제국의 선포로 왕은 황제가 되어 여기에서 하례(賀禮)를 받았으며 이듬해 2월 다시 전각 이름을 태극전에서 중화전으로 바꾸었는데 [3]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할 당시에는 이곳 중화전을 짓기 전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현재의 즉조당(卽祚堂)이 태극전(太極殿)이란 이름으로 법전의 역할을 하였다. 이듬해 2월 태극전은 다시 중화전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1902년 현재 중화전의 위치에 중층규모의 중화전을 새롭게 건립했다. 그러나 1904년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현재의 덕수궁 영역이 잿더미가 되면서 중화전은 옛모습을 잃고 지금처럼 단층 팔작지붕으로 1906년 재건된다. 이는 당시의 궁핍한 재정상황과 더불어 나날이 쇠락해 가는 대한제국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4]
외관
중화전의 평면은 인정전과 비슷한 정면 5칸(61.4척), 측면 4칸(58척)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고, 넓은 이중의 월대 위에 높직한 초석을 놓아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월대에는 석계가 마련되어 있고, 석계 한가운데에 답도를 놓아 쌍용을 새겨놓았으며, 각 층마다 석계 모서리에는 석수를 조각해 놓았다. 고주와 창방에는 낙양각(落陽刻)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건물 내·외부 사이의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언제나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의 다포식 구성을 하고 있으며, 중화전에서 사용된 공포 형태는 외부에 쇠서를 달고 있는 운기당초문으로, 이것은 초각형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후기 다포의 변화에서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특히 궁궐건축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어놓고 토수(吐首)를 끼웠다. 단청은 은은한 채색의 모루단청이고 광창과 꽃살분합문을 달아 위관(偉觀)을 돋우었다. 건물의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두 마리를 조각으로 장식하여 건물의 위상을 높였다.[5]
의의
- 의례공간으로서의 중화전
중화전은 의례공간의 특성에 맞는 건축적 배치와 구성을 갖추고 있다. 말하자면 중화전은 왕조사회의 위계와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인 셈이다. 그러한 특징은 중화문에서 중화전에 이르는 조정(朝廷) 마당의 삼도(三道)와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 두 벌의 월대를 설치해 잘 드러내고 있다. 중화전에서 국왕이 참석해 공식적인 행사를 열 때는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관리들이 이곳 월대 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6]
- 대한제국기 비극적 사건의 무대
- ↑ 김왕직,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왕직,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왕직,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중화전",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통건축,
『문화콘텐츠닷컴 』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0. 네이버 참조: "중화전", 문화원형백과,『네이버지식백과』online . - ↑ 김왕직,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중화전",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통건축,
『문화콘텐츠닷컴 』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0. 네이버 참조: "중화전", 문화원형백과,『네이버지식백과』online . - ↑ "중화전",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통건축,
『문화콘텐츠닷컴 』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0. 네이버 참조: "중화전", 문화원형백과,『네이버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