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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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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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개성시 독암동 탄현문(炭峴門) 밖에 있었던 절.<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588 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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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가 935년(태조 18)에 창건한 국찰(國刹)이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으나 태조 이래 역대 왕들이 참배하였다. 946년 정종(定宗)은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고, 성종(成宗)은 공신 서희(徐熙)가 이곳에서 병이 들자 친히 나가서 곡식 1,000섬과 말 3필, 왕의 옷 일습을 시납(施納)하고 완쾌되기를 빌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25525 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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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년(현종 9)에는 개국사의 불탑을 중수하고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계단(戒壇)을 만들어 3,200명의 승려를 제도하기도 하였다. 1083년 문종(文宗)은 송나라에서 가져온 대장경을 태자로 하여금 봉안하게 하였다. 예종(睿宗) 때는 숙종(肅宗)과 명의왕후(明懿王后)의 영정을 이곳에 봉안하였고, 고종(高宗) 때는 성종(成宗)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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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 침입했을 때 소실되어 오랫동안 복구되지 못하였다가, 충숙왕(忠肅王) 때인 1323년~1325년에 남산종(南山宗)의 종사(宗師) 목헌(木軒)이 중창하였다. 절터에 남아 있던 석등(石燈)은 고려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옮겨 세웠다.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7년 8월 21일 (월) 16:21 판

개성 개국사
(開城 開國寺)
대표명칭 개성 개국사
영문명칭 Gaeguksa Temple, Gaeseong
한자 開城 開國寺
주소 경기도 개성시 독암동
건립시기 935년
창건자 고려 태조



정의

경기도 개성시 독암동 탄현문(炭峴門) 밖에 있었던 절.[1]

내용

고려 태조가 935년(태조 18)에 창건한 국찰(國刹)이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으나 태조 이래 역대 왕들이 참배하였다. 946년 정종(定宗)은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고, 성종(成宗)은 공신 서희(徐熙)가 이곳에서 병이 들자 친히 나가서 곡식 1,000섬과 말 3필, 왕의 옷 일습을 시납(施納)하고 완쾌되기를 빌었다.[2]

1018년(현종 9)에는 개국사의 불탑을 중수하고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계단(戒壇)을 만들어 3,200명의 승려를 제도하기도 하였다. 1083년 문종(文宗)은 송나라에서 가져온 대장경을 태자로 하여금 봉안하게 하였다. 예종(睿宗) 때는 숙종(肅宗)과 명의왕후(明懿王后)의 영정을 이곳에 봉안하였고, 고종(高宗) 때는 성종(成宗)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몽골이 침입했을 때 소실되어 오랫동안 복구되지 못하였다가, 충숙왕(忠肅王) 때인 1323년~1325년에 남산종(南山宗)의 종사(宗師) 목헌(木軒)이 중창하였다. 절터에 남아 있던 석등(石燈)은 고려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옮겨 세웠다.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석

  1. 김위석, "개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개국사", 『두산백과』online.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