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
(→내용) |
||
37번째 줄: | 37번째 줄: | ||
허균(許筠)의 아버지는 허엽(許曄)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허봉|허봉(許篈)]]과 [[허난설헌|허난설헌(許蘭雪軒)]]과 형제이다.<ref>김동욱,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30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허균(許筠)의 아버지는 허엽(許曄)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허봉|허봉(許篈)]]과 [[허난설헌|허난설헌(許蘭雪軒)]]과 형제이다.<ref>김동욱,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30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허균은 학문은 [[유성룡|유성룡(柳成龍)]]에게서 배웠고,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인 [[이달|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 21세인 1589년(선조 22)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1594년(선조 27)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597년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고,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다가 서울의 기생을 가까이 한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후 춘추관 기주관(記注官)과 형조좌랑을 거쳐 1602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으며, 이 해에 원접사(遠接使) [[이정구|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었다. 1604년에는 수안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ref>최호, "[http://gangneu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gangneung&dataType=01&contents_id=GC00303973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강릉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때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ref>김동욱,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30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14년(광해군 5)에는 천추사(千秋使)로, 그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ref>최호, "[http://gangneu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gangneung&dataType=01&contents_id=GC00303973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강릉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ref>김동욱,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30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17년 [[조선 선조|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인목대비]] 폐모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조선 광해군|광해군]]의 신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였다. 3년 뒤 조카 사위인 [[의창군 이광|의창군(義昌君)]]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 혐의를 받았다. [[하인준|하인준(河仁俊)]]·[[김개|김개(金闓)]]·[[김우성|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2563&cid=40942&categoryId=33383 허균]",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허균은 학문은 [[유성룡|유성룡(柳成龍)]]에게서 배웠고,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인 [[이달|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 21세인 1589년(선조 22)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1594년(선조 27)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597년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고,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다가 서울의 기생을 가까이 한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후 춘추관 기주관(記注官)과 형조좌랑을 거쳐 1602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으며, 이 해에 원접사(遠接使) [[이정구|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었다. 1604년에는 수안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ref>최호, "[http://gangneu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gangneung&dataType=01&contents_id=GC00303973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강릉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때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매창|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이 두터웠다.<ref>김동욱,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30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14년(광해군 5)에는 천추사(千秋使)로, 그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ref>최호, "[http://gangneu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gangneung&dataType=01&contents_id=GC00303973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강릉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ref>김동욱,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30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17년 [[조선 선조|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인목대비]] 폐모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조선 광해군|광해군]]의 신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였다. 3년 뒤 조카 사위인 [[의창군 이광|의창군(義昌君)]]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 혐의를 받았다. [[하인준|하인준(河仁俊)]]·[[김개|김개(金闓)]]·[[김우성|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2563&cid=40942&categoryId=33383 허균]",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
+ |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와 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문을 했다고 한다.<ref>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0612&cid=41708&categoryId=41711 허균]", 국어국문학자료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 |||
+ | 허균은 시와 산문, 평에 두루 능하였고, 자유분방한 기질의 소유자로 「호민론(豪民論)」이나 「유재론(遺才論)」과 같은 글을 통하여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 사회에 저항하는 백성들의 힘을 강조했다. 『홍길동전』 이외에 「한정록(閑情錄)」, 「학산초담(鶴山樵談)」, 「유재론(遺才論)」, 「호민론(護民論)」 등 그의 저술을 모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가 전한다.<ref>김명호 외,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휴머니스트, 2006.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2050&cid=41708&categoryId=41736 허균]",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東征錄)」은 『선조실록』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ref>김동욱,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030 허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비문의 찬자=== | ===비문의 찬자=== |
2017년 8월 21일 (월) 00:14 판
허균(許筠) | |
대표명칭 | 허균 |
---|---|
한자표기 | 許筠 |
생몰년 | 1569년(선조 2)-1618년(광해군 10) |
본관 | 양천(陽川) |
호 | 교산(蛟山),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 |
자 | 단보(端甫) |
대표저서 | 『』 |
부 | 허엽(許曄) |
모 | 강릉김씨(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허균(許筠)의 아버지는 허엽(許曄)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허봉(許篈)과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형제이다.[1]
허균은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서 배웠고,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인 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 21세인 1589년(선조 22)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1594년(선조 27)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597년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고,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다가 서울의 기생을 가까이 한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후 춘추관 기주관(記注官)과 형조좌랑을 거쳐 1602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으며, 이 해에 원접사(遠接使)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었다. 1604년에는 수안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2] 이때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이 두터웠다.[3] 1614년(광해군 5)에는 천추사(千秋使)로, 그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4]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5] 1617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였다. 3년 뒤 조카 사위인 의창군(義昌君)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 혐의를 받았다. 하인준(河仁俊)·김개(金闓)·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6]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와 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문을 했다고 한다.[7]
허균은 시와 산문, 평에 두루 능하였고, 자유분방한 기질의 소유자로 「호민론(豪民論)」이나 「유재론(遺才論)」과 같은 글을 통하여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 사회에 저항하는 백성들의 힘을 강조했다. 『홍길동전』 이외에 「한정록(閑情錄)」, 「학산초담(鶴山樵談)」, 「유재론(遺才論)」, 「호민론(護民論)」 등 그의 저술을 모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가 전한다.[8]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東征錄)」은 『선조실록』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9]
비문의 찬자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시각자료
주석
- ↑ 김동욱, "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호, "허균",
『디지털강릉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동욱, "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호, "허균",
『디지털강릉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동욱, "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허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허균", 국어국문학자료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명호 외,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휴머니스트, 2006. 온라인 참조: "허균",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동욱, "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정구복, "김부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