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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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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사찰령 때 쌍봉사가 대흥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라는 내용을 넣으면 좋을 듯
 
사찰령 때 쌍봉사가 대흥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라는 내용을 넣으면 좋을 듯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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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는 남쪽 바닷가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었다. 절이 들어앉은 두륜산의 옛이름이 한듬이었으므로 절도 오랫동안 한듬절로 불렸다. 옛말에서 ‘한’이란 ‘크다’라는 뜻이고 ‘듬’이나 ‘둠’ 등은 ‘둥글다’라거나 ‘덩어리’라는 뜻을 가진다. 바닷가에 갑자기 큰 산이 솟아 있으므로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듬은 한자와 섞여 대듬이 되었다가 다시 대둔(大芚)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절도 대듬절, 대둔사로 바뀌어 불렸다. 한편,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한반도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계속 뻗어내려와 마지막으로 맺은 산이라 하여 다시 백두의 두(頭), 곤륜의 륜(崙)을 따서 두륜산(頭崙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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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유래===
두륜산 대둔사의 이름 바뀐 사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제 때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頭崙山은 頭輪山으로 바뀌었고 대둔사는 대흥사(大興寺)로 고정되었다. 절이 두륜산 대둔사(頭崙山 大芚寺)라는 이름을 회복한 것이 겨우 1993년, 그래서 사람들은 요즘도 대흥사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에도 대흥사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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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大芚寺)는 남쪽 바닷가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었다. 절이 들어앉은 두륜산의 옛이름이 한듬이었으므로 절도 오랫동안 한듬절로 불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듬은 한자와 섞여 대듬이 되었다가 다시 대둔(大芚)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절도 대듬절, 대둔사로 바뀌어 불렸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76&cid=42840&categoryId=42849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대둔사가 처음 생긴 것은 언제일까? 대둔사의 내력을 적은 것으로는 순조 23년(1823)에 초의(草衣)선사와 수룡(袖龍)선사가 편집해 낸 『대둔사지』가 있다. 이 책은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 그전부터 내려오던 대둔사에 관한 책들의 내용을 살리면서 거기에 포함된 잘못들을 지적한 종합적인 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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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죽미기』에서는 양(梁) 천감(天監) 13년(신라 법흥왕 1년, 514)에 아도화상이 절을 창건했다고 하였다. 또 『만일암고기』에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나라 안에 절 500개를 짓는 것이 좋다고 상소할 때 대둔사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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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한반도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계속 뻗어내려와 마지막으로 맺은 산이라 하여 다시 백두의 두(頭), 곤륜의 륜(崙)을 따서 두륜산(頭崙山)이 되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76&cid=42840&categoryId=42849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은 혜장선사는 아도화상이 절을 지었다는 시기가 그가 활약한 시기(신라 미추왕 2년, 265)보다 300년 가까이 앞선다는 것, 도선국사가 당에 갔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헌강왕 원년은 도선이 태어난 해라는 것을 지적하며 두 설을 모두 일축하고, 대둔사 창건 연대를 신라 말로 보았다. 지금 절 안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과 북미륵암 마애불(보물 제4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301호)이 모두 나말여초의 것임을 보더라도 대둔사는 나말여초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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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가 의발(衣鉢)을 전하고부터 대둔사의 사세는 크게 일어났다. 서산대사라면 흔히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서 활약한 것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선(禪)과 교(敎), 더 나아가서는 좌선, 진언, 염불, 간경 등 여러 경향으로 나뉘어 저마다 자기들의 수행만을 최고로 치던 당시 불교계에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갈파하며 선과 교가 서로 다른 둘이 아님을 주장, 선교 양종을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다. 대둔사는 그의 법을 받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잡아 왔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76&cid=42840&categoryId=42849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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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頭崙山'은 '頭輪山'으로 바뀌었고, 대둔사는 대흥사(大興寺)로 고정되었다. 절이 두륜산 대둔사(頭崙山 大芚寺)라는 이름을 회복한 것이 겨우 1993년, 그래서 사람들은 요즘도 대흥사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에도 대흥사라고 적혀 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76&cid=42840&categoryId=42849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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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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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가 처음 생긴 것은 언제일까? 대둔사의 내력을 적은 것으로는 순조 23년(1823)에 초의(草衣)선사와 수룡(袖龍)선사가 편집해 낸 『대둔사지』가 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76&cid=42840&categoryId=42849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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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죽미기』에서는 양(梁) 천감(天監) 13년(신라 법흥왕 1년, 514)에 아도화상이 절을 창건했다고 하였다. 또 『만일암고기』에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나라 안에 절 500개를 짓는 것이 좋다고 상소할 때 대둔사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은 혜장선사는 아도화상이 절을 지었다는 시기가 그가 활약한 시기(신라 미추왕 2년, 265)보다 300년 가까이 앞선다는 것, 도선국사가 당에 갔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헌강왕 원년은 도선이 태어난 해라는 것을 지적하며 두 설을 모두 일축하고, 대둔사 창건 연대를 신라 말로 보았다. 지금 절 안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과 북미륵암 마애불(보물 제4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301호)이 모두 나말여초의 것임을 보더라도 대둔사는 나말여초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76&cid=42840&categoryId=42849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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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휴정|서산대사(西山大師)]]가 의발(衣鉢)을 전하고부터 대둔사의 사세는 크게 일어났다. 대둔사는 그의 법을 받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잡아 왔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76&cid=42840&categoryId=42849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도립공원에 있는 절이며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이다. 면적은 약 60,163㎡에 이른다. 이 절의 기원은 426년 신라의 승려 정관(淨觀)이 창건한 만일암(挽日庵)이라고도 하고, 또 544년(진흥왕 5)에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508년(무열왕 8)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승이 중창하였다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확인할 길이 없다. 그 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사찰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도립공원에 있는 절이며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이다. 면적은 약 60,163㎡에 이른다. 이 절의 기원은 426년 신라의 승려 정관(淨觀)이 창건한 만일암(挽日庵)이라고도 하고, 또 544년(진흥왕 5)에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508년(무열왕 8)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승이 중창하였다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확인할 길이 없다. 그 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사찰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8월 16일 (수) 01:08 판

해남 대흥사
(海南 大興寺)
대표명칭 해남 대흥사
한자 海南 大興寺
이칭 대둔사(大芚寺)
주소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508호
문화재 지정일 2009년 12월 21일
관리자 해남 대흥사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경내문화재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의발 등 유물 일괄,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유물,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 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 해남 대흥사 천불전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頭輪山)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절.[1]

내용

사찰령 때 쌍봉사가 대흥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라는 내용을 넣으면 좋을 듯

명칭유래

대둔사(大芚寺)는 남쪽 바닷가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었다. 절이 들어앉은 두륜산의 옛이름이 한듬이었으므로 절도 오랫동안 한듬절로 불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듬은 한자와 섞여 대듬이 되었다가 다시 대둔(大芚)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절도 대듬절, 대둔사로 바뀌어 불렸다.[2]

한편,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한반도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계속 뻗어내려와 마지막으로 맺은 산이라 하여 다시 백두의 두(頭), 곤륜의 륜(崙)을 따서 두륜산(頭崙山)이 되었다.[3]

일제 때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頭崙山'은 '頭輪山'으로 바뀌었고, 대둔사는 대흥사(大興寺)로 고정되었다. 절이 두륜산 대둔사(頭崙山 大芚寺)라는 이름을 회복한 것이 겨우 1993년, 그래서 사람들은 요즘도 대흥사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에도 대흥사라고 적혀 있다.[4]

대둔사의 역사

대둔사가 처음 생긴 것은 언제일까? 대둔사의 내력을 적은 것으로는 순조 23년(1823)에 초의(草衣)선사와 수룡(袖龍)선사가 편집해 낸 『대둔사지』가 있다.[5]

우선 『죽미기』에서는 양(梁) 천감(天監) 13년(신라 법흥왕 1년, 514)에 아도화상이 절을 창건했다고 하였다. 또 『만일암고기』에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나라 안에 절 500개를 짓는 것이 좋다고 상소할 때 대둔사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은 혜장선사는 아도화상이 절을 지었다는 시기가 그가 활약한 시기(신라 미추왕 2년, 265)보다 300년 가까이 앞선다는 것, 도선국사가 당에 갔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헌강왕 원년은 도선이 태어난 해라는 것을 지적하며 두 설을 모두 일축하고, 대둔사 창건 연대를 신라 말로 보았다. 지금 절 안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과 북미륵암 마애불(보물 제4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301호)이 모두 나말여초의 것임을 보더라도 대둔사는 나말여초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6]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의발(衣鉢)을 전하고부터 대둔사의 사세는 크게 일어났다. 대둔사는 그의 법을 받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잡아 왔다.[7]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도립공원에 있는 절이며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이다. 면적은 약 60,163㎡에 이른다. 이 절의 기원은 426년 신라의 승려 정관(淨觀)이 창건한 만일암(挽日庵)이라고도 하고, 또 544년(진흥왕 5)에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508년(무열왕 8)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승이 중창하였다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확인할 길이 없다. 그 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사찰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거느린 승군(僧軍)의 총본영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1604년(선조 37) 서산이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전한 후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 후 1665년(현종 6)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고, 1669년에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3년에는 불탄 천불전(千佛殿: 지방유형문화재 제48호)이 재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抑佛)의 탄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길러 내어 의심(義諶)·삼우(三遇)·도안(道安)·문신(文信)·추붕(秋鵬) 등 13인의 대종사(大宗師)와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 등 13인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시킨 명찰이다. 경내에는 대웅보전·침계루(枕溪樓)·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백설당(白雪堂)·천불전·용화당(龍華堂)·도서각(圖書閣)·표충사·서원·서산대사기념관·대광명전(大光明殿)·만일암 등 기타 많은 당우(堂宇)가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응진전전(應眞殿前) 3층석탑, 북미륵암(北彌勒庵) 3층석탑이 있고 국보로 지정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있다. 또한 서산대사를 비롯한 여러 명승의 부도(浮屠)와 탑이 있으며, 특히 서산대사의 유물과 이광사(李匡師)·김정희(金正喜)·이삼만(李三晩) 등 역대 명필들의 필적으로 된 각종 현판도 남아 있다. 1998년 12월 23일 대둔산 대흥사 일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8호 해남 대흥사와 명승 제66호 두륜산 대흥사 일원으로 나뉘어 다시 지정되었다.[8]

[9]

해남 대흥사 초의매

대흥사 경내 숙정당 앞에는 수령 200년, 나무 높이 4.5m의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다.[10]

우리나라에 차 문화를 보급한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심은 매화나무인데, 이 나무가 ‘초의매(草衣梅)’이다.[11]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유물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의발 등 유물 일괄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천불전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 휴정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해남 대흥사 대한불교조계종 A는 B와 관련있다
해남 대흥사 화순 쌍봉사 A는 B와 관련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주석

  1. 김위석, "해남 대흥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대둔사(대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8. "해남 대흥사", 『두산백과』online.
  9. 김위석, "해남 대흥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김현우, 『매화나무』, 이담북스, 2010. 온라인 참조: "해남 대흥사 초의매", 매화나무,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1. 김현우, 『매화나무』, 이담북스, 2010. 온라인 참조: "해남 대흥사 초의매", 매화나무,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