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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는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외교가이다. 친명 노선을 걷던 [[고려 공민왕|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된 뒤 친원파들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을 통해 두 나라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펴 전란의 위기를 해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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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두 나라 사이에 자꾸 분란이 생기자 명 태조가 성이 나, 장차 고려에 출병하려 할 뿐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키고, 지난 5년간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사신의 볼기를 치고 유배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태에서 명 태조의 생일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모두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이때 친원파들이 정몽주를 추천했다.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더구나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급히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명 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니 외교적인 능력이 탁월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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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년에는 왜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는데, 이 역시 앞서 사신으로 갔던 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친원파들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교화시키자 그들은 정몽주를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왜인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한다. 이때에도 귀국 시 수백 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정몽주의 죽음===
 
===정몽주의 죽음===

2017년 8월 14일 (월) 16:05 판

정몽주(鄭夢周)
대표명칭 정몽주
한자표기 鄭夢周
영문명칭 Jeong Mong ju
본관 영일(迎日, 지금의 포항)
이칭 몽란(夢蘭), 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포은(圃隱)
달가(達可)
출생지 영천(永川)
사망지 선죽교(善竹矯)
시대 고려시대
국적 고려
대표저서 포은집(圃隱集)
정운관(鄭云瓘)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내용

개요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출생지는 영천(永川)이며,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1]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처음 부른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 뒤에 몽룡(夢龍)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몽주'라 고쳤다.[2]

업적

유능한 외교가, 정몽주

정몽주는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외교가이다. 친명 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된 뒤 친원파들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을 통해 두 나라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펴 전란의 위기를 해소했다.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자꾸 분란이 생기자 명 태조가 성이 나, 장차 고려에 출병하려 할 뿐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키고, 지난 5년간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사신의 볼기를 치고 유배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태에서 명 태조의 생일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모두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이때 친원파들이 정몽주를 추천했다.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더구나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급히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명 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니 외교적인 능력이 탁월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77년에는 왜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는데, 이 역시 앞서 사신으로 갔던 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친원파들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교화시키자 그들은 정몽주를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왜인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한다. 이때에도 귀국 시 수백 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정몽주의 죽음

정몽주와 자신의 뜻이 맞지않아 더이상 정몽주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李芳遠)은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善竹矯)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3]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4]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운관 정몽주 A는 B의 아버지이다
정몽주 포은집 A는 B를 저술하였다
정몽주 단심가 A는 B를 저술하였다
정몽주 정도전 A는 B와 관련있다
정몽주 이성계 A는 B와 관련있다
정몽주 이방원 A는 B와 관련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337년 정몽주가 태어났다
1392년 이방원으로 인해 정몽주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박천규, "정몽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박천규, "정몽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윤희진, "정몽주",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5월 20일
  4. 윤희진, "정몽주",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5월 20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