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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세붕(周世鵬)은 1522년([[조선 중종|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다 [[김안로|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고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좌천되었다.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가 이듬해 백운동(白雲洞)에 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1543년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59499 주세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주세붕(周世鵬)은 1522년([[조선 중종|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다 [[김안로|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고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좌천되었다.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가 이듬해 백운동(白雲洞)에 [[안향|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1543년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59499 주세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1545년([[조선 명종|명종]] 1)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應敎)·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도승지(都承旨)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大司成)·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漆原)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주박(周博)을 양자로 삼았다.<ref>윤희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3318 주세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1545년([[조선 명종|명종]] 1)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應敎)·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도승지(都承旨)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大司成)·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漆原)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주박(周博)을 양자로 삼았다.<ref>윤희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3318 주세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저서 및 작품=== | ===저서 및 작품=== |
2017년 8월 13일 (일) 10:15 판
주세붕(周世鵬) | |
대표명칭 | 주세붕 |
---|---|
한자표기 | 周世鵬 |
생몰년 | 1495년-1554년 |
본관 | 상주(尙州) |
시호 | 문민(文敏) |
호 | 신재(愼齋), 남고(南皐), 무릉도인(武陵道人), 손옹(巽翁) |
자 | 경유(景游) |
출생지 | 칠원(漆原) |
시대 | 조선 |
대표저서 | 죽계지, 해동명신언행록, 진헌심도, 무릉잡고 |
배우자 | 남씨 부인 |
부 | 주문보(周文俌) |
모 | 황근중(黃謹中)의 딸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인
내용
생애
주세붕(周世鵬)은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다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고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좌천되었다.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가 이듬해 백운동(白雲洞)에 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1543년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1]
1545년(명종 1)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應敎)·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도승지(都承旨)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大司成)·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漆原)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주박(周博)을 양자로 삼았다.[2]
저서 및 작품
저서로는 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 『진헌심도(進獻心圖)』가 있고 문집으로는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다. 편서로는 『죽계지(竹溪誌)』,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 『심도이훈(心圖彛訓)』 등이 있으며,『도동곡(道東曲)』, 『육현가(六賢歌)』, 『엄연곡(儼然曲)』, 『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의 단가 8수가 전한다.[3]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주세붕 | 백운동서원 | A는 B를 건립하였다 | |
주세붕 | 무릉잡고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주세붕 | 죽계지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주세붕 | 도동곡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주세붕 초상(전신상) | 주세붕 | A는 B를 묘사하였다 | |
주세붕 초상(반신상) | 주세붕 | A는 B를 묘사하였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522년 | 주세붕이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
1541년 | 주세붕이 풍기군수가 되었다 |
1543년 |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
1545년 | 주세붕이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다 |
1548년 | 주세붕이 호조참판이 되었다 |
1549년 | 주세붕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수양서원을 건립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