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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식, 「사자산 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 『불교학연구』 Vol.21, 2008, 219-257쪽. | *최연식, 「사자산 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 『불교학연구』 Vol.21, 2008, 219-257쪽.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0031&cid=40942&categoryId=33380 절중]",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0031&cid=40942&categoryId=33380 절중]",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03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 +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03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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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2일 (토) 23:36 판
절중(折中) | |
대표명칭 | 절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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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Jeoljung |
한자 | 折中 |
생몰년 | 826(흥덕왕 1)-900(효공왕 4) |
시호 | 징효(澄曉) |
호 | 통효(通曉) |
휘 | 절중(折中) |
탑호 | 보인(寶印) |
승탑 | 영월 징효국사 부도 |
승탑비 |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은 826년(헌덕왕 18) 휴암(鵂嵒: 현재의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선당(先幢)은 지방의 동량[1]으로, 대대로 지방 토호였던 것으로 보인다.[2]
대사는 휘(諱)가 절중(折中), 자(字)는 ... 속성은 ...씨이며 휴암(鵂嵒) 사람이다. 조상이 모성(牟城)[3]에서 벼슬살이하다가 마침내 그곳의 군족(郡族)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당(先幢)인데,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뛰어나서 명성이 화이(華夷)에 유명하였다. 효행과 자비로움은 역사서에 실렸고, 공로와 업적은 왕부(王府)에 간직되었으니, 고을의 귀감이 되고 마을의 동량이 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절중의 어머니 백씨(白氏)는 한 천녀(天女)가 아름다운 보배 구슬을 건네주는 꿈을 꾸고 대사를 잉태하였다.
어머니 백씨(白氏)가 잠깐 잠이 들었을 때 한 천녀(天女)가 "아미(阿㜷)께서는 반드시 지혜 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보배를 ... 꿈을 꾸어 ... 대사(大師)를 임신하게 되었다. 보력(寶曆) 2년(826, 헌덕왕 18) 4월 7일에 탄생하시었는데, 날 때부터 성스러운 자태를 지녔고, 아이들처럼 놀지 아니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출가수행
절중은 7세가 되던 해인 832년에 출가하여 오관산사(五冠山寺)[4] 진전(珍傳)의 제자가 되었다.
일곱 살 때 선승(禪僧)이 걸식(乞食)하는 스님을 보고서 출가(出家)를 흠모하는 마음을 내게 되었다. 마침내 양친(兩親)을 하직하고서 홀로 오관산사(五冠山寺)에 가서 진전법사(珍傳法師)를 배알하였다. 법사께서 이마를 만져 주는 순간 문득 마음을 쉰다는(息心) 뜻을 깨달았으며 곧 자실(慈室)[5]에 머무르면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4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15세 때인 840년에는 부석사(浮石寺)에서 화엄학(華嚴學)을 수학하였으며, 844년에는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열아홉 살이 되자 백성군(白城郡: 경기도 안성)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대사(大師)가 (계(戒)를 받으려고) 계단(戒壇)에 올라가는 날에 갑자기 보랏빛 기운이 계단에서 솟아올랐다. (이를 본) 이 절의 노(老)스님이 대중들에게 "이 사미(沙彌)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닦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증험을 보인 것으로 보건대 마땅히 계주(戒珠)를 얻었을 것이다. 반드시 후대(後代)에 미혹한 중생을 인도할 사람이므로 먼저 이러한 특별한 징조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이전의 태몽(胎夢)을 돌이켜 생각하니 완연히 부합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이후 여러 지역을 다니며 공부하다가, 847년 무렵 중국에서 막 귀국한 도윤화상(道允和尙)의 명성을 듣고 그가 머물던 풍악산 장담사(長潭寺)로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선(禪)을 수학하였다.[6] 당시 도윤은 중국에서 마조도일(馬組道一)의 수제자 남전(南泉)으로부터 법을 받고 돌아왔으며,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장담사로 몰려들었다.[7] 절중은 장담사에 오랫동안 머물며 도윤의 선법(禪法)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풍악(楓岳)[8] 장담사(長潭寺)에 오랫동안 중국에 가서 유학하고 귀국한 지 아직 얼마되지 않은 도윤(道允) 화상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화상이) 선을 닦고 계시는 곳으로 찾아가 오체투지[9]의 예를 올렸다. 화상께서는 "영산에서 너와 헤어진 지 벌써 몇 생(生)이나 되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었구나. 어찌 이다지도 늦게 왔는가"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미 입실을 허락받고서 스님의 자애로운 가르침에 깊이 감화되었으니 스스로 바라는 바에 맞았다. 이로부터 화상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화상은 일찍이 중국에서 남전화상(南泉和尙)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알현하였었다. 남전(南泉)은 강서도일(江西道一)을 계승하였고, 강서(江西)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을 이었으며, 남악(南岳)은 곧 조계혜능(曹溪慧能)의 으뜸가는 제자이니, 그 고조와 증조를 가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사(大師)는 이때부터 (도윤화상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좌우(左右)를 떠나지 아니하고, 동산(東山)의 법을 이어받게 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4-4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도담선원(道譚禪院)으로 옮겨 역시 중국에서 선을 수학하고 돌아온 자인선사(慈忍禪師)의 문하에서 16년간 수학하였다.
그 후 곧바로 도담(道譚)선(원?)에 가서 자인(慈忍)선사를 함께 알현하였다. (대사가) 찾아뵙고 예를 드리자마자 (자인선사는) 곧바로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처럼 "만나는게 늦었다. 목을 길게 늘여 빼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중략)... 그리고 나서 16년 동안 선문에 머무르며 진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마침내 망언(亡言)의 경지를 밟아 득의(得意)의 마당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니 쪽보다 더 푸르고, 붉은 빛은 꼭두서니에서 나왔지만 꼭두서니보다 더 붉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활동
20대부터 50대까지 도윤(道允)과 자인(慈忍) 밑에서 중국 불교와 신라 불교를 공부한 절중이 57세가 되던 882년, 국통(國統)[10]을 지낸 위공(威公)이 경주 부근 곡산사(谷山寺) 주지 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그러나 절중은 경주와 가까운 절에 주지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 거절하였다.[11] 대신 영월 사자산(師子山)에 있던 운예선사(雲乂禪師)의 요청을 받아들여 제자들을 이끌고 사자산 흥녕선원(興寧禪院)에 주석하였다. 이에 왕실에서는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에 소속시키고 여러 우대 조치를 베풀어 주었다.[12]
중화(中和) 2년(882, 헌강왕 8)에 전(前) 국통(國統)인 대법사(大法師) 위공(威公)이 대사(大師)가 머무를 곳이 없어서 부평초처럼 떠돌아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마음을 아파하였다. 급히 곡산사(谷山寺)를 ...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주지(住持)하도록 해주었다. 간절한 마음씀에 깊이 감동하여 잠시 머무르기는 하였지만 서울(京輦)과 가까운 아쉬움이 있어서 마음에 편하지는 아니하였다. 이때 사자산(師子山)의 석운예(釋雲乂) 선사(禪師)가 대사의 덕이 중국과 우리나라에 으뜸임에도 정해진 처소가 없음을 듣고서 제자를 보내어 간절한 마음을 표하면서 "노승(老僧)이 머무르는 곳은 작은 그릇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대사께서 여기에 머무르신다면 그릇과 뚜껑이 서로 잘 맞는 것이 될 것입니다. 스님이 아니시면 누가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행차를 돌리어 사찰로 와서 머무르십시오"라고 요청하였다. 대사는 멀리서 보내온 정성을 거스를 수 없어서 보내온 뜻에 따르고자 하였다. 곧 선중(禪衆)을 이끌고 가서 그곳에 주석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5-4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그러나 신라 말의 혼란기에 전란이 잇따라 당시 흥녕선원 주변의 정세는 계란을 쌓아놓은 듯 위태로웠다. 이에 절중은 886년 다시 제자들을 이끌고 흥녕선원을 떠나 남쪽으로의 피난을 결정하였고, 피난 도중 흥녕선원이 모두 소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절중이 상주(尙州)의 조령(鳥嶺) 근처에 머무르는 동안 신라 왕실에서는 음죽현(陰竹縣: 충청북도 음성)의 원향사(元香寺)에 머물기를 요청하였으나, 절중은 이를 거절하고 스승인 도윤의 묘탑과 옛 동문들이 있는 쌍봉사(雙峰寺)로 향하였다.[13][14]
... 이때에 혼란스러운 운수를 당하여 시대가 힘들었고, 왕위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과 같았다. 곳곳에서 불타는 연기와 말달리는 먼지가 갑자기 일어나고, 나쁜 기운이 사찰에까지 미칠까 염려되었다. 대순(大順) 2년(891, 진성여왕 5)에 상주(尙州)의 남쪽으로 피난하여 잠시 오령(烏嶺, 鳥嶺의 착오?)에서 머물렀다. 이때에 본산(本山)은 과연 병화(兵火)를 만나 사찰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대사가 길흉(吉凶)을 미리 점치어 함께 타 죽을 재난을 면한 것이었다. ...(중략)... (대사는) 북쪽 땅을 떠나 점차 남쪽으로 움직이면서 공주(公州)를 통과하게 되었다. (공주의) 성 아래를 지나갈 때에 장사(長史) 김공휴(金公休)와 군리(郡吏) 송암(宋嵒) 등이 멀리서 자비로운 명성을 듣고서 군성(郡城)으로 맞아들이고 아울러 ... 좋은 거처를 가려 그곳에 머무르시기를 청하였다. 대사는 장사에게 "빈도(貧道)[15]는 늙어가므로 쌍봉사(雙峰寺)에 가서 직접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을 찾아보고 돌아가신 스승님의 탑에 참배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가는 것이므로 지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6-4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쌍봉사에 도착하자 왕실에서는 무량사(無量寺)와 영신사(靈神寺)을 정해 머물기를 청하였고, 지방 세력가인 김사윤(金思尹)은 분령군(芬嶺郡: 전라남도 순천)의 동림사(桐林寺)[16]를 제공하였다. 절중은 제자들과 함께 동림사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전란을 예상하고 북쪽으로 길을 떠나 강화도 은강선원(銀江禪院)으로 옮겼다.[17]
대왕께서는 대사가 남방(南方)을 돌아다니시며 사방을 보호하심에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받들어 모시고 크게 귀의한다는 것을 들으시고, 대사가 길이 국가를 복되게 하고 아울러 나라를 지켜주시는 것을 알게 되어 특별히 무량사(無量寺)와 영신사(靈神寺)의 두 절을 정하여 머물기를 청하였다. 이 주의 여러 향리인 김사윤(金思尹) 등은 (대사의) 선지(禪旨)를 듣고 법의 은혜를 깊이 느끼고서 분령군(芬嶺郡)의 동림사(桐林寺)를 영원히 선거(禪居)에 속하게 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시기를 청하였다. ...(중략)... 얼마 후 대사가 대중에게 "이곳은 반드시 재해가 일어나고 도적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있을 것이다. 미리 대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급히 북산(北山)을 가리켰다. 곧바로 서해로 배를 타고 나아갔다. ...(중략)... 이윽고 은강선원(銀江禪院)에 이르니, 마음에 조금 흡족하였다. 이에 열흘 넘게 지내면서 임시로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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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7-4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입적
절중이 은강선원에 머물렀을 때 진성여왕은 국사(國師)의 예우를 표하고 보좌를 청하였으나, 절중은 이미 때가 늦었음을 이유로 거절하였다.[18] 그리고 900년 3월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74세, 법랍 56세였다.
건녕(乾寧) 7년(900, 효공왕 4) 3월 9일 아침에 이르러 홀연히 문인(門人)들에게 "삼계(三界)는 모두 공(空)이고, 만연(萬緣)은 다 같이 고요하다. 나는 이제 떠나려한다.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여 선문(禪門)을 수호하고,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아서 나의 은혜에 보답하라"라고 말하고 말이 끝나자 앉은 채로 입멸(入滅)하였다. 세속 나이는 75세이고, 법랍은 56이었다. 이때에 하늘빛은 창망하고, 햇빛은 참담하였으며, 인간 세계는 눈을 잃고, 세상 사람들은 마음 아파하였다. 상심에 잠겼으니, 하물며 문하의 제자들이야 오죽하였겠는가. 다 같이 마음의 상례를 간절히 하고 스승과 헤어지는 것을 함께 슬퍼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승탑과 탑비의 건립
절중이 입적하자 제자들은 스승의 탑을 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은강선원이 바다의 구석에 위치하고 있어서 마치 절벽에 매달린 제비집과 같았기 때문에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스승이 남은 생을 보내고자 했던 동림사로 가서 906년 스승의 사리를 모시는 탑을 건립하였다.[19]
천축(天竺) 구시(拘尸)[20]의 법을 본받아 석실(石室)의 서쪽에서 다비(茶毗)하고, 사리 1천 알을 수습하였다. 그 날 밤 이 현(縣)의 제치사(制置使)인 김견환(金堅奐)은 "석단(石壇) 위에서 보라색 기운이 하늘로 뻗치고, 천중(天衆)이 날아와서 사리를 수습하여 갔다"라고 말하였는데, 아침을 기다려 선원에 가서 그 특이한 상서를 승려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대중들이 이에 깜짝 놀라 쌍림(雙林)으로 가보니, 과연 일백여 알의 사리를 수습할 수 있었다. 천인(天人)들이 공경하고, 스님과 신도들이 애통해 하는 것이 (이와 같았따?) ... 이곳은 강가이고 현읍(縣邑) ... 안타까운 것은 사찰과의 거리가 멀고 바닷가에 치우쳐 있고, 생각건대 스님들이 성(城) 근처에 살고 있으니, 마치 제비가 천막 위에 살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사리를 모시고 동림사(桐林寺)로 가서 천우(天祐) 3년(906, 효공왕 10)에 탑을 높이 세우고 사리를 안치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8-49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탑을 건립한 후 절중의 제자들은 신라 정부에 요청하여 탑비를 건립하고자 하였다. 효공왕이 '징효대사(澄曉大師)'와 '보인지탑(寶印之塔)'이라는 시호와 탑호를 내려주고 예부시랑(禮部侍郞)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하였지만 박인범은 비문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고려 건국 이후, 태조 왕건이 최언위(崔彦撝)에게 비문의 작성을 지시하였고 924년에 마침내 비문이 완성되었다.[21]
법을 전해 받은 제자인 여종(如宗), 홍가(弘可), 신정(神靖), 지공(智空) 등 1천여 사람들이 다 같이 쌓아 놓은 탑이 무너질까 염려되고, 사리를 모신 언덕이 들판으로 변할까 걱정되어 대궐에 표를 올려 큰 비석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아뢰었다. 효공대왕(孝恭大王)은 일찍부터 (스님의) 빛나는 풍모를 사모하고 항상 불교의 이치를 숭상하였으므로 징효대사(澄曉大師)라는 시호(諡號)와 보인지탑(寶印之塔)이라는 탑의 이름을 추증해 주시고, 이어서 한림학사로서 전(前) 예부시랑(禮部侍郞)인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시었다. 그 인범이 왕명(王命)을 겨우 받들고 아직 비문을 짓기도 전에 장수(漳水)[22] 물가에 누우니, 곧바로 장학(藏壑)을[23] 한탄하게 되었다. 이에 문인들은 (대사의) 아름다운 자취가 점차 사라지는데 비석에 새겨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대사의) 행장(行狀)을 정리하였으니 실로 구름이 비석의 돌을 쓰다듬고 학의 울음이 대궐에 들리게 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9-5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하지만 비문이 완성된 이후에도 탑비는 곧바로 건립되지 못하였다. 절중의 탑비는 그가 입적한 900년으로부터 44년, 부도가 건립된 906년으로부터 38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건립되었다. 이것은 그의 비문에 기록된 것과 같이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사회적 혼란기라는 상황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탑비를 건립할 적절한 지역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본질적인 이유라고 해석되기도 한다.[24]
용덕(龍德) 4년(924, 고려 태조 7) 갑신(甲申) 4월 15일에 비문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나라에 일이 많았다. 2기(二紀)[25]의 시간이 지나자 홀연히 사군(四郡)[26]에서 연기가 사라지고 온 나라의 먼지가 그치게 되었다. 천복(天福) 9년(944, 혜종 1) 갑진(甲辰) 6월 17일에 세운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50-5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승려의 탑비는 그와 깊은 인연이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문도들의 거점이 되는 곳에 건립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절중의 경우 이러한 곳이 바로 사자산 흥녕선원이었다. 하지만 흥녕선원은 전란으로 황폐화되어 절중의 탑비를 모실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이곳이 중흥될 때까지 절중의 탑비가 건립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흥녕선원에 절중의 탑비를 건립한 것은 단순히 그를 기념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문도들이 거점을 새롭게 마련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27] 이후 절중 문도의 거점이 된 흥녕선원은 충주유씨(忠州劉氏)를 비롯한 지역 세력가들의 후원을 받아 고려 초에 중창된 것으로 보이며,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사찰로 자리잡게 되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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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량지재(棟梁之材). 기둥과 들보로 쓸 만한 재목이라는 뜻으로, 한 집안이나 한 나라를 떠받치는 중대한 일을 맡을 만한 인재를 이르는 말.
- ↑ 박선영, "절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지금의 강원도 금화군 금성면 지역으로 추정됨.
- ↑ 오관산중(五冠山中)에 있었던 절이란 말. 오관산(五冠山)은 경기도 장단(長湍)에 위치. 이 산중(山中)에 극락사(極樂寺), 영통사(靈通寺), 흥성사(興聖寺) 등이 있었는데, 이들 중 어느 절에 투신출가(投身出家)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88쪽.
- ↑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로 사찰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 ↑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 이일야, "사자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83-184쪽.
- ↑ 풍악은 보통 금강산의 이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의 풍악은 내용상 도윤화상이 머물고 있던 전라남도 지역의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 ↑ 불교에서 행하는 큰절의 형태. "오체투지",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라 때, 왕이 임명한 승려의 가장 높은 지위.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국통", 용어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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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비유이다.
- ↑ 최연식, 「사자산 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 『불교학연구』 Vol.21, 2008, 242쪽.
- ↑ 1紀는 원래 12년으로, 10여 년의 시간을 가리킨다. 2紀는 20여 년이다.
- ↑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 ↑ 최연식, 「사자산 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 『불교학연구』 Vol.21, 2008, 242-243쪽.
- ↑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36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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