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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소안|소안(紹安)]]이 유서를 받들어 알리니,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가 애도하는 심정에서, 시호는 보각(普覺), 탑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승탑|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1393년에 그의 문인들이 부도 곁에 비(碑)를 세우고자 그의 제자 [[만우|만우(卍雨)]]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찬(撰)하게 하고, [[소안|소안(紹安)]]이 이를 받들어 [[조선 태조|태조]]에게 알리니, [[조선 태조|태조]]는 [[권근|권근(權近)]]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1394년에 [[충주 청룡사]]에 탑비가 세워졌다. | 문인 [[소안|소안(紹安)]]이 유서를 받들어 알리니,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가 애도하는 심정에서, 시호는 보각(普覺), 탑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승탑|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1393년에 그의 문인들이 부도 곁에 비(碑)를 세우고자 그의 제자 [[만우|만우(卍雨)]]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찬(撰)하게 하고, [[소안|소안(紹安)]]이 이를 받들어 [[조선 태조|태조]]에게 알리니, [[조선 태조|태조]]는 [[권근|권근(權近)]]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1394년에 [[충주 청룡사]]에 탑비가 세워졌다. | ||
{{Blockquote|임신년(태조 1, 1392년) 가을 7월에 우리 주상께서 혁명하여 왕업을 열자 선사께서는 즉시 표문을 올려 축하하고, 얼마 뒤에 노병으로 그 직위와 절[寺]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전문(牋文)과 함께 인(印)을 보낸 다음 청룡사로 행장을 옮겼다. 시자(侍者) 담원(湛圓)이 전문과 인을 받들고 대궐에 나가니, 임금의 뜻이 전과 같이 스스로 섬기고자 해서 곧 인을 되돌려 보냈다. | {{Blockquote|임신년(태조 1, 1392년) 가을 7월에 우리 주상께서 혁명하여 왕업을 열자 선사께서는 즉시 표문을 올려 축하하고, 얼마 뒤에 노병으로 그 직위와 절[寺]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전문(牋文)과 함께 인(印)을 보낸 다음 청룡사로 행장을 옮겼다. 시자(侍者) 담원(湛圓)이 전문과 인을 받들고 대궐에 나가니, 임금의 뜻이 전과 같이 스스로 섬기고자 해서 곧 인을 되돌려 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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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병신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偈 : 산문체로 된 경전의 1절의 끝이나, 맨 끝에 4자로 된 글귀로 묘한 뜻을 읊어 놓은 운문)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8일 동안 상(床)에 앉았으되 얼굴이 평시와 같았다. | 9월 18일 병신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偈 : 산문체로 된 경전의 1절의 끝이나, 맨 끝에 4자로 된 글귀로 묘한 뜻을 읊어 놓은 운문)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8일 동안 상(床)에 앉았으되 얼굴이 평시와 같았다. | ||
|출처=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 |출처=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
2017년 8월 12일 (토) 18:40 판
혼수(混修) | |
대표명칭 | 혼수 |
---|---|
영문명칭 | Honsu |
한자 | 混修 |
생몰년 | 1320(충숙왕 7)-1392(태조 1) |
시호 | 보각(普覺) |
호 | 환암(幻菴) |
휘 | 혼수(混修) |
탑호 | 편광(遍光) |
자 | 무작(無作) |
성씨 | 조(趙) |
출신지 | 광주(廣州: 현재의 경기도 광주) |
승탑비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혼수의 자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菴)이다. 혼수의 기록이 남아 있는 문집류에는 환노(幻老) 또는 환옹(幻翁)이라고도 지칭한 사례가 있다. 1320년(충숙왕 7) 3월 13일에 그의 아버지가 부임한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 용궁면(龍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헌부산랑 조숙령(풍양 조씨)이고 어머니 청주 경씨이다.[1] 아버지가 사냥 나갔다가 새끼를 품은 사슴을 만나 사냥을 그만 두고 돌아와 곧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린 그를 데리고 친가로 돌아왔다. 혼수는 어려서 몸이 약하여 병을 앓았는데 출가하면 건강하고 큰 스님이 될 것이라는 점술사의 예언에 따라 어머니의 추천으로 계송(繼松) 대선사에게 12세 출가한다.[2][3]
출가수행
혼수는 1341년(충혜왕 2)에 선시에 응시하여 상상과에 합격하였다. 이 때 고승 및 유생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이색과 가까이 지냈다. 29세인 1348년(충목왕 2) 가을에 이웃사람이 급사함을 보고 수도에 더욱 정진할 것을 맹서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장좌불와로 정진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어머니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하여 경산(京山, 지금의 경북 성주군)에 주석하며 어머니를 5-6년간 보살피고 어머니가 운명하자 『대자법화경(大字法華經)』을 사경(寫經)하여 명복을 빌었다.
혼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머물고 있는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찾아가 『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당시 재상 조쌍중(趙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 능엄경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다. 이 법회에서 공민왕이 그의 도를 듣고 회암사 주지를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금오산을 거쳐 오대산의 신성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같은 산내의 고운암에 머물고 있는 나옹 혜근을 찾아가 자주 질의하고 입실을 허락받았다. 그로부터 금란가사와 상아불자 산형주장자를 신물로 받았다.
활동
1361년(공민왕 10) 가을에 강릉도 안겸사가 혼수를 천거하여 궁궐로 나아가 왕실과 신료들에게 보살계를 받도록 하였으나, 상경 도중에 숨어 정진하였고, 1369년 김황(金璜)의 원찰(願刹)인 서운사(瑞雲寺)에서 선회(禪會)를 크게 열었다.
1370년(공민왕 19)에 나옹 혜근이 회암사에서 공부선을 개최하였는데 그가 참여하여 유일하게 인증을 받았다. 그는 회암사의 주지를 하라는 왕명이 있을 것을 알아차리고 위봉산에 은둔하였다. 1372년 왕명으로 호불사(護佛寺)에, 이듬해에는 내불당(內佛堂)에 머물렀으나, 밤에 빠져나와 평해의 서산(西山)으로 갔다가 1374년 다시 내원에 들어가 공민왕에게 불법를 가르쳤고, 특히 왕대비의 존경을 받았다. 그 해 9월 우왕이 즉위, 광통무애 원묘대지보제(廣通無碍圓妙大智普濟)의 호를 내렸다. 1375년(우왕 1) 송광사에 머무르고, 이듬해 서운사로 돌아갔다. 1378년 치악산에서 연회암으로 돌아왔다가 왕의 청으로 광암사(光巖寺)에서 3년을 지낸 뒤, 밤에 도망하여 원주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다시는 주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용문사·청평사·치악산 등을 편력하였다.[4]
1383년 4월 1일 왕이 어서·인장·법복·예폐(禮幣) 등을 연회암에 보내어 국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오불심종 흥자운비복국이생 묘화무궁도대선사 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렸으며, 충청북도 충주의 개천사(開天寺)에 상주하도록 하였다. 1384년 해적이 충주를 침범하자 왕의 청에 의하여 광암사로 옮겼다. 다음 해 가을에는 50일 동안의 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의 주맹(主盟)이 되었으며, 1386년 보국사(輔國寺) 불정회(佛頂會) 및 수창궁(壽昌宮) 소재석(消災席)에 초청받아 주관하였다.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개천사로 옮겨 머물다가,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표문을 올리고 치악산으로 돌아갔지만 몇 달만에 다시 국사에 봉하여져 개천사로 옮겼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대장경을 인성(印成)하여 1391년(공양왕 3) 서운사에 봉안하고 경회(慶會)를 베풀었다.[5]
입적
1392년 9월 18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偈)[6]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춘추가 73세에 하랍(夏臘)이 60세였다. 문인 소안(紹安)이 유서를 받들어 알리니, 태조 이성계가 애도하는 심정에서, 시호는 보각(普覺), 탑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1393년에 그의 문인들이 부도 곁에 비(碑)를 세우고자 그의 제자 만우(卍雨)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찬(撰)하게 하고, 소안(紹安)이 이를 받들어 태조에게 알리니, 태조는 권근(權近)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1394년에 충주 청룡사에 탑비가 세워졌다.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 권근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 충주 청룡사 | A는 B에 있다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 혼수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 혼수 | 는 -를 위한 승탑이다 | |
혜근 | 혼수 | A는 B의 스승이다 | |
계송 | 혼수 | A는 B의 스승이다 | |
식영감 | 혼수 | A는 B의 스승이다 | |
혼수 | 만우 | A는 B의 스승이다 | |
혼수 | 소안 | A는 B의 스승이다 | |
혼수 | 희진 | A는 B의 스승이다 | |
혼수 | 불호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송광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서운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광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오대산 신성암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내불당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개천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이성계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이직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공민왕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창왕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우왕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공양왕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목은집 | A는 B에 기록되었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황인규, 105쪽.
- ↑ 황인규, 105쪽.
- ↑ 민백
- ↑ 민백
- ↑ 민백
- ↑ 고승들이 입적할 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 "임종게(臨終偈)", 두산백과.
참고문헌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1>", 한국불교, 2006.07.03.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2>", 한국불교, 2006.07.05.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3>", 한국불교, 2006.07.12.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4>", 한국불교, 2006.07.21.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5>", 한국불교, 2006.08.07.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6>", 한국불교, 2006.08.23.
- 강호선, 「고려말 幻庵混修의 활동과 그 의미」, 『한국선학』 43, 한국선학회, 2016, 5-34쪽.
- 곽승훈, 「고려 말 幻庵 선사의 『護法論』 간행 배포와 그 영향」, 『한국민족문화』 40,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1, 167-199쪽.
- 김상현, "혼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30-63쪽.
- 황인규, 「幻庵 混修의 生涯와 佛敎史的 位置」, 『경주사학』 18, 경주사학회, 1999, 101-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