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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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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을 밀수하여 부당이득을 취하였다가 발각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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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22일 [[김두한]] 의원이 [[사카린 밀수사건]]에 항의하여 국회 본회의장에 오물을 던진 사건.<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3886 국회오물투척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내용'''==
 
=='''내용'''==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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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사카린 밀수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여당 국회의원의 언론제보였다.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건축자재로 위장한 밀수품을 팔아 거액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제보는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밀수'를 '5대 사회악'의 하나로 규정해놓고 있었으며, 당시 삼성과 경쟁 관계에 있던 언론들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일개 회사의 일탈이 아니라 정권과의 뒷거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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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삼성그룹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건축자재로 위장한 밀수품을 팔아 거액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밀수를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데다가, 언론 보도의 여파로 사태는 일파만파 확산되었다. 결국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을 상정, 통과시키고 관계 장관들을 소환하여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소재 등을 추궁하였다.<br/>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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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난 것은 대정부 질의 둘째 날인 9월 22일이었다. 당시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은 마지막 질의자로 단상에 올랐고 연설 말미에 기습적으로 오물을 투척하였다. 투척 바로 전에 한 말은 다음과 같다.  
1966년 9월 22일 이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가 진행 중이던 국회 본회의에서 [[김두한]] 의원이 각료들에게 [[국회 오물투척사건|오물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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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이것이 도적질해 먹는 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해서 합리화하고... 합리화시키는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 그러니까 이 내각은 고루 고루 맛을 보여야 알지…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출처="[http://likms.assembly.go.kr/record/mhs-40-010.do#none 제6대국회 국회본회의 회의록]",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회회의록』<sup>online</sup></online></html>, 대한민국국회.}}
이로 인해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한국비료공업]] [[이병철]] 회장은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및 각종 언론,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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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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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 이효상은 오물을 던진 [[김두한]] 의원의 징계를 요구하였고, 국회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김두한]] 의원의 제명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잃고 국회의장모욕,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사카린 밀수사건]]을 일으킨 [[한국비료공업]] [[이병철]] 회장은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으나 18개월 만인 1968년 2월에 경영에 복귀했다. 이후 밀수사건 수사는 뚜렷한 결말 없이 마무리되었다.
일선에서 물러났던 [[이병철]] 회장은 70년대 후반 경영에 복귀했고 [[중앙일보]]를 창간 했으며 1983년에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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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와 영향===
이후 [[이병철]]의 아들 [[이맹희]]는 자신이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혔으며, 1993년 회고록을 발간하여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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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난 후 [[김두한]]의 행동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당시 봐주기식 수사 등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민당에서는 김두한을 옹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당으로 영입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자극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이니만큼 대중매체에서도 자주 다루어졌고 특히 드라마 야인시대, 영웅시대 56화, 제3공화국 등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Blockquote|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 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출처=위키백과 기여자,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B9%B4%EB%A6%B0_%EB%B0%80%EC%88%98_%EC%82%AC%EA%B1%B4 사카린 밀수 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2017년 8월 8일.}}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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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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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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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기여자, "[https://ko.wikipedia.org/wiki/%EA%B5%AD%ED%9A%8C_%EC%98%A4%EB%AC%BC%ED%88%AC%EC%B2%99%EC%82%AC%EA%B1%B4 국회 오물투척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2017년 8월 8일.
#*"[http://www.vop.co.kr/A00000282441.html 이병철 100년, 다시 돌아본 '사카린 밀수사건']", 『민중의 소리』, 2010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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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기여자, "[https://namu.mirror.wiki/w/%EA%B5%AD%ED%9A%8C%20%EC%98%A4%EB%AC%BC%20%ED%88%AC%EC%B2%99%EC%82%AC%EA%B1%B4 국회 오물 투척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 미러』<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2017년 8월 11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3417 사카린밀수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3417 사카린밀수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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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3886 국회오물투척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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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청산, 1993.
 
  
 
[[분류:민족기록화]][[분류:사건]]
 
[[분류:민족기록화]][[분류:사건]]

2017년 8월 11일 (금) 15:23 판

국회 오물투척사건(國會 汚物投擲事件)
위키백과 기여자, "국회 오물 투척사건", 『나무위키 미러』online, 최종확인:2017년 8월 11일.
대표명칭 국회 오물투척사건
한자표기 國會 汚物投擲事件
시대 현대
날짜 1966년 9월
관련인물 김두한,이병철,박정희
관련단체 한국비료공업



정의

1966년 9월 22일 김두한 의원이 사카린 밀수사건에 항의하여 국회 본회의장에 오물을 던진 사건.[1]

내용

개요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삼성그룹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건축자재로 위장한 밀수품을 팔아 거액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밀수를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데다가, 언론 보도의 여파로 사태는 일파만파 확산되었다. 결국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을 상정, 통과시키고 관계 장관들을 소환하여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소재 등을 추궁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대정부 질의 둘째 날인 9월 22일이었다. 당시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은 마지막 질의자로 단상에 올랐고 연설 말미에 기습적으로 오물을 투척하였다. 투척 바로 전에 한 말은 다음과 같다.

Quote-left.png 이것이 도적질해 먹는 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해서 합리화하고... 합리화시키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 그러니까 이 내각은 고루 고루 맛을 보여야 알지…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Quote-right.png
출처: "제6대국회 국회본회의 회의록", 『국회회의록』online, 대한민국국회.


결말

국회의장 이효상은 오물을 던진 김두한 의원의 징계를 요구하였고, 국회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김두한 의원의 제명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잃고 국회의장모욕,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사카린 밀수사건을 일으킨 한국비료공업 이병철 회장은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으나 18개월 만인 1968년 2월에 경영에 복귀했다. 이후 밀수사건 수사는 뚜렷한 결말 없이 마무리되었다.

평가와 영향

사건이 일어난 후 김두한의 행동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당시 봐주기식 수사 등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민당에서는 김두한을 옹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당으로 영입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자극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이니만큼 대중매체에서도 자주 다루어졌고 특히 드라마 야인시대, 영웅시대 56화, 제3공화국 등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사카린 밀수사건 국회 오물투척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1966년
이병철 사카린 밀수사건 A는 B를 주도하였다 1966년
김두한 국회 오물투척사건 A는 B를 주도하였다 1966년 9월 22일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국회오물투척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