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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서|당서(唐書)]]』 에서 신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두발(頭髮)을 머리에 두르고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는 오래 전부터 가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미체(美髢)’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다리이며, 신라의 명물로 외국에 수출도 하였다. 또한 『[[당서]]』에서 신라의 남자가 머리를 깎아 팔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가난한 자가 머리를 깎아 다리로 판 것으로 보인다.<ref>유희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80 가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당서|당서(唐書)]]』 에서 신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두발(頭髮)을 머리에 두르고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는 오래 전부터 가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미체(美髢)’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다리이며, 신라의 명물로 외국에 수출도 하였다. 또한 『[[당서]]』에서 신라의 남자가 머리를 깎아 팔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가난한 자가 머리를 깎아 다리로 판 것으로 보인다.<ref>유희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80 가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고구려의 경우 안악 3호분 동수부인 벽화에서 동수부인과 시녀들이 가체를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의 복식이 비슷했고,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용 금제 머리 장식을 보아 가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ref>이영주, 「조선시대 가체 변화에 관한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 고구려의 경우 안악 3호분 동수부인 벽화에서 동수부인과 시녀들이 가체를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의 복식이 비슷했고,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용 금제 머리 장식을 보아 가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ref>이영주, 「조선시대 가체 변화에 관한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 ||
− | 석사학위논문, 2000, | + | 석사학위논문, 2000, 14-15쪽.</ref> 따라서 가체의 풍습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가체의 풍습은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영향도 받아 더욱 크게 성행하였다. <ref>유희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80 가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조선 시대 {{PAGENAME}}의 유행과 금지령=== | ||
+ | 조선시대 초기 여인들의 머리 모양은 고려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 중엽부터 가체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후기로 갈수록 크기가 커지고, 왕비부터 천민까지 모두 가체를 얹게 되었다. 가체의 유향은 다양한 머리 모양의 출현과 더불어 비녀, 뒤꽂이, 떨잠과 같은 머리 장신구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정도가 극심하여 조정에서는 수십년 동안 가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결국 1788년 [[조선 정조]]는 가체를 금지하는 「[[가체신금사목]]」을 반포한다. | ||
+ | <ref>이영주, 「조선시대 가체 변화에 관한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 ||
+ | 석사학위논문, 2000, 17-18쪽.</ref> | ||
==주석== | ==주석== |
2017년 7월 25일 (화) 17:16 판
가체 (加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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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가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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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加髢 |
이칭 | 다래, 다리, 다레, 체(髢), 월자(月子) |
유형 | 장신구 |
정의
여자의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넣는 딴 머리가발이다.
내용
조선 이전의 가체 사용
『당서(唐書)』 에서 신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두발(頭髮)을 머리에 두르고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는 오래 전부터 가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미체(美髢)’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다리이며, 신라의 명물로 외국에 수출도 하였다. 또한 『당서』에서 신라의 남자가 머리를 깎아 팔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가난한 자가 머리를 깎아 다리로 판 것으로 보인다.[1] 고구려의 경우 안악 3호분 동수부인 벽화에서 동수부인과 시녀들이 가체를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의 복식이 비슷했고,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용 금제 머리 장식을 보아 가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따라서 가체의 풍습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가체의 풍습은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영향도 받아 더욱 크게 성행하였다. [3]
조선 시대 가체의 유행과 금지령
조선시대 초기 여인들의 머리 모양은 고려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 중엽부터 가체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후기로 갈수록 크기가 커지고, 왕비부터 천민까지 모두 가체를 얹게 되었다. 가체의 유향은 다양한 머리 모양의 출현과 더불어 비녀, 뒤꽂이, 떨잠과 같은 머리 장신구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정도가 극심하여 조정에서는 수십년 동안 가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결국 1788년 조선 정조는 가체를 금지하는 「가체신금사목」을 반포한다. [4]
주석
- ↑ 유희경, "가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주, 「조선시대 가체 변화에 관한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14-15쪽.
- ↑ 유희경, "가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주, 「조선시대 가체 변화에 관한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17-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