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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주한,『계곡평론소고(谿谷評論小攷)』, 정음사, 1981 | + | * 김주한,『계곡평론소고(谿谷評論小攷)』, 정음사, 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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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3일 (일) 01:59 판
장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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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장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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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신 |
유형 | 인물 |
정의
1587(선조 20)∼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가족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장례원사의 장자중(張自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천현감 장일(張逸)이고, 아버지는 판서 장운익(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
생애 및 활동사항
1605년(선조 39)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해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 뒤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책봉되어 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 억울하다고 여긴 죄를 바로잡아 구제함)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다음 해 대사헌·좌부빈객(左副賓客)·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하자 반대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했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해,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 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해 진실을 인식하려 했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했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했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칭송하였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계곡집』·『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
주석
참고문헌
사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백헌집(白軒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청선고(淸選考)
저서
- 김주한,『계곡평론소고(谿谷評論小攷)』, 정음사,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