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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1일 (금) 22:02 판
정의
중국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글씨체.
내용
왕희지(王羲之)는 동진(東晉)시대 사람으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서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서예가이다.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을 배웠고, 한(漢)나라와·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하였다. 당 태종(唐 太宗)은 그의 글씨를 수집하여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아끼다가 죽을 때 관에 넣어갔다고 한다.[1][2]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도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이 있다.[3]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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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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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