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PAGENAME}}의 업적) |
(→참고문헌) |
||
50번째 줄: | 50번째 줄: | ||
<references/> | <references/>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웹자원=== | ||
+ |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439&index_id=cp04390148&content_id=cp043901480001&search_left_menu=4 소혜왕후 한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 ||
[[분류:인물]] | [[분류:인물]] | ||
[[분류:한글고문서]] | [[분류:한글고문서]] | ||
[[분류:이혜영]] | [[분류:이혜영]] |
2017년 7월 17일 (월) 22:11 판
목차
정의
한확의 딸로 1437년에 태어나 세조의 장남 도원군(조선 덕종)과 혼인하였고 숙종을 낳았다. 1504년에 사망하였다.
내용
소혜왕후의 가문 청주한씨
소혜왕후의 아버지인 한확은 자신의 누이가 명나라 성조의 후궁이 되면서 명과의 외교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운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며 우의정에 오른다. 소혜왕후의 가문은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도 소혜왕후의 소생 자을산군이 조선 성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그 권력을 유지한다. 이렇게 소혜왕후의 가문은 명과 조선 두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면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1]
소혜왕후의 생애
계유정난과 성종의 즉위
소혜왕후는 1437년 한확과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홍여방의 딸 남양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혜왕후는 수양대군(조선 세조)의 맏아들 도원군(조선 덕종)과 혼인하였고 1454년에 월산대군을 낳았다. 다음해 계유정난으로 시아버지 수양대군(조선 세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한확이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을 양위라고 명나라를 설득하고 귀국 하던 중 죽고, 1457년 남편 도원군이 죽었다. 세자 자리는 해양대군(예종)에게 가게 되고 해양대군은 1468년 예종으로 즉위한다. 아버지와 남편의 연이은 죽음 속에서도 소혜왕후는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한명회의 딸과 혼인시키는 등 그 세력을 구축해나간다. 결국 예종이 즉위한지 14개월 만에 죽고 자신의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게된다. [2]
수렴청정과 갑자사화
성종이 즉위하자 소혜왕후는 시어머니 정희왕후의 추천으로 수렴청정을 하게되고 인수대비라는 칭호를 받는다. 며느리 폐비윤씨는 1473년 성종의 후궁이 되었고 1476년 왕비가 된다. 그 해 연산군을 낳는다. 그러나 1477년부터 정희왕후, 소혜왕후, 성종 3명이 왕비 윤씨의 폐위를 논의되었고, 1482년 왕비 윤씨는 폐비되었고 5일 만에 사약알 받고 죽게 된다. 이후 손자 연산군이 즉위하게 되자 대왕대비로 칭호가 높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연산군의 어머니, 며느리 윤씨를 폐비시켰다는 이유로 연산군의 원망을 받게 된다.[3] 연산군이 어머니 윤씨가 모함을 받아 폐위되었다는 것을 알고 박해(갑자사화)를 가하려 하자, 병상에 있던 소혜왕후가 꾸집으니 연산군이 머리로 들이받았다고 한다. 그 후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4]
소혜왕후의 업적
일찍 남편을 잃은 이후 소혜왕후는 불교에 의지하였다. 세조의 능엄경 언해에 참여하였는데, 1471년 간경도감이 폐지되자 이듬해부터 직접 불경 목판을 수집하여 인쇄하기도 하였다. 또한 도첩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신하들과 논쟁하는 등 적극적으로 당시의 불교억압정책에 맞서기도 하였다. [5] 1472년 성종은 역대 제왕과 후비의 일화 중 본받을 만한 것과 경계할 만한 것으로 채택하여 『제왕명감』과 『후비명감』등을 만들었다. 1481년에는 『삼강행실도』를 언해하여 부녀자들에게 강습하고자 했다. 이렇게 성종 때에는 풍속을 교정하기 위해 교재를 편찬하고, 유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내용들을 법제화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유교 교화정책의 일환으로 소혜왕후가 1475년 『어제내훈』을 저술한것으로 보인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음에도 유교적 여성교훈서를 작성한 것은 자신의 불교적 모습에 대해 신하들이 가진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더불어 유교 교화정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아들 성종의 유교적 통치권 확립과 왕권 강화에 기여하고자 했던 것이다.[6]
주석
- ↑ 김희연, 「소혜왕후의 《내훈》저술과 여성교육」,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9-12쪽.
- ↑ 김희연, 「소혜왕후의 《내훈》저술과 여성교육」,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12-16쪽.
- ↑ 김희연, 「소혜왕후의 《내훈》저술과 여성교육」,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16-17쪽.
- ↑ 최완기,
「소혜왕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희연, 「소혜왕후의 《내훈》저술과 여성교육」,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20쪽.
- ↑ 김희연, 「소혜왕후의 《내훈》저술과 여성교육」,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22-23쪽.
참고문헌
웹자원
- 「소혜왕후 한씨」,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