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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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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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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도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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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도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이 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53537 왕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난정서(蘭亭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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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와 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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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는 거위를 매우 좋아하였다. 왕희지는 붓글씨를 더욱 생동감 있고 힘차게 표현하기 위해 늘 거위가 물에서 헤엄치는 모양을 본떠서 손목을 단련했다고 한다.<ref>한국인문고전연구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38098&cid=56777&categoryId=56777 왕희지]". 중국인물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어느날 산음에 사는 한 도사가 좋은 거위를 기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는데 도사는 왕희지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주면 거위를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왕희지는 흔쾌히 써주고 거위를 모두 품에 안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일화와 관련해 전해내려오는 [[이백|이백(李白)]]의 《왕우군王右軍》이라는 시도 있다.
 
왕희지는 거위를 매우 좋아하였다. 왕희지는 붓글씨를 더욱 생동감 있고 힘차게 표현하기 위해 늘 거위가 물에서 헤엄치는 모양을 본떠서 손목을 단련했다고 한다.<ref>한국인문고전연구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38098&cid=56777&categoryId=56777 왕희지]". 중국인물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어느날 산음에 사는 한 도사가 좋은 거위를 기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는데 도사는 왕희지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주면 거위를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왕희지는 흔쾌히 써주고 거위를 모두 품에 안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일화와 관련해 전해내려오는 [[이백|이백(李白)]]의 《왕우군王右軍》이라는 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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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右軍 왕우군<ref>"[http://artminhwa.com/%EC%99%95%ED%9D%AC%EC%A7%80%E7%8E%8B%E7%BE%B2%E4%B9%8B-%EA%B1%B0%EC%9C%84%EB%A5%BC-%EC%82%AC%EB%9E%91%ED%95%9C-%EC%84%9C%EC%98%88%EA%B0%80/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민화』<sup>online</sup></online></html>,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ref>  
 
右軍本淸眞 왕희지는 타고난 본성이 청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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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曾別主人 어찌 일찍이 주인과 작별인사인들 했겠는가.
 
何曾別主人 어찌 일찍이 주인과 작별인사인들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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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의 필력====
 
====왕희지의 필력====
  

2017년 7월 13일 (목) 10:40 판

왕희지(王羲之)
파일:BHST Wangheeji.jpg
"왕희지", 『위키백과』.
대표명칭 왕희지
한자표기 王羲之
생몰년 303년-361년
이칭 왕우군(王右軍), 서성(書聖)
담재(澹斋)
일소(逸少)
출생지 진나라 저장 성 사오싱
사망지 진나라
국적 중국
유형 서예가



정의

중국의 동진(東晉)의 서예가.

내용

개요

왕희지(王羲之)는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書聖)[1]으로 불린다. 예서(隷書)를 잘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의 서체를 완성하였다.[2] 왕희지의 공적으로 인하여 글씨는 단순히 기록의 수단을 넘어 예술로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3]

생애

왕희지는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琊)에서 회남태수(淮南太守)를 지낸 왕광(王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숙부 왕도(王導)는 동진(東晉) 왕조 건설의 일등공신이었고, 또 다른 숙부인 왕돈(王敦) 역시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4] 이러한 명문사족의 집안환경은 왕희지가 격조 높은 문예사조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5]

16살 때 동진의 명신 치감의 눈에 들어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후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을 배웠고, 한(漢)나라와·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하였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 궁중 도서관의 사무관에서 시작해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351년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6] 및 회계의 내사(會稽內史)에 이르렀다. 하지만 처음부터 출세보다는 도(道)를 추구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원하는 마음이 강해 부임한지 4년만에 사임하였다.[7] 왕희지는 회계에 머물며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다가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품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도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이 있다..[8]

난정서(蘭亭序)

난정서(蘭亭序)는 왕희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 353년 3월 3일에 왕희지를 비롯한 동진의 명사들 41명은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다. 이 때 참석자들이 지었던 시를 모아 책을 만들었는데 왕희지가 서문(序文)을 짓고 그 글씨를 손수 썼다. 이것이 바로 난정서(蘭亭序)이며 지금까지도 중국 서예의 최고 진품(珍品)으로 인정받고 있다.[9]

일화

왕희지와 거위

왕희지는 거위를 매우 좋아하였다. 왕희지는 붓글씨를 더욱 생동감 있고 힘차게 표현하기 위해 늘 거위가 물에서 헤엄치는 모양을 본떠서 손목을 단련했다고 한다.[10] 어느날 산음에 사는 한 도사가 좋은 거위를 기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는데 도사는 왕희지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주면 거위를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왕희지는 흔쾌히 써주고 거위를 모두 품에 안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일화와 관련해 전해내려오는 이백(李白)의 《왕우군王右軍》이라는 시도 있다.

王右軍 왕우군<ref>"[http://artminhwa.com/%EC%99%95%ED%9D%AC%EC%A7%80%E7%8E%8B%E7%BE%B2%E4%B9%8B-%EA%B1%B0%EC%9C%84%EB%A5%BC-%EC%82%AC%EB%9E%91%ED%95%9C-%EC%84%9C%EC%98%88%EA%B0%80/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민화』<sup>online</sup></online></html>,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ref> 
右軍本淸眞 왕희지는 타고난 본성이 청진하여
瀟灑出風塵 맑고 깨끗한 성정이 속세를 벗어났다네.
山陰遇羽客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니
要此好鵝賓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 맞이하였네.
掃素寫道經 흰 비단에 도덕경을 쓰니
筆精妙入神 필법이 정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었네.
書罷籠鵝去 글씨 다 쓰고 거위를 조롱에 넣고 가니
何曾別主人 어찌 일찍이 주인과 작별인사인들 했겠는가.

왕희지의 필력

왕희지의 필력(筆力)은 매우 출중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진나라 황제가 북교(北郊, 지금의 베이징시 베이자오)에 제사를 드리러 갔을 때, 왕희지를 시켜 나무판 위에 제문을 쓰도록 한 다음 장인(匠人)을 보내 조각하도록 했다. 장인은 나무판을 한 층 한 층 깎아내서 왕희지 서법의 친필이 항상 보일 수 있도록 했는데, 세 번을 깎아내고 나서야 밑바닥이 보였다. 왕희지의 글씨가 나무판을 그렇게 깊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장인은 왕희지의 필력의 기세와 힘에 매우 감탄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희지 [王羲之, wáng xī zhī] - 중국 최고의 서법가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왕희지와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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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왕희지

주석

  1. 글씨를 빼어나게 잘쓰는 사람을 높여서 이르는말.
  2. "왕희지", 『두산백과』online.
  3.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
  4.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
  5. 李昇姸, 「王羲之의 道敎觀과 書藝」, 도교문화연구 제23집, 2005, 316쪽.
  6. 왕우군(王右軍)이라는 그의 별칭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7. 처음부터 회계에서 벼슬을 한 것도 이곳의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왕희지".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8. "왕희지", 『두산백과』online.
  9.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
  1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왕희지".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