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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 ===인용 및 참조=== | ||
+ | * 금종숙, 「朝鮮時代 철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 ||
+ | * 금종숙, 「조선시대 철릭의 형태 및 바느질법 연구-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
+ | * 김지혜ㆍ최정욱, 「철릭의 디자인 현대화에 관한 연구」, 『한복문화』 제11권 3호, 한복문화학회, 2008. | ||
+ | * 金贊珠, 「철릭에 關한 服飾史的 硏究 」,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
+ | * 文明姬, 「帖裏에 關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
+ | * 예경자, 「조선전기 철릭의 실증적 고찰」,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
+ | * 이순자, 「帖裏에 관한 再考論」, 『복식문화연구』 9권 2호, 복식문화학회, 2001. | ||
+ | * 이은주, 「철릭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한국의류학회지』 13권 4호, 한국의류학회, 1989. | ||
+ | * 이은주, 「철릭의 명칭에 관한 연구」, 『한국의류학회지』 12권 3호, 한국의류학회, 1988. | ||
+ | * 李恩珠, 「16세기 전기 철릭의 구성법 일례 -金欽祖(1461~1528)분묘 출토의 철릭을 중심으로-」, 『복식문화연구』 7권 2호, 복식문화학회, 1999. | ||
+ | * 장인우, 「조선시대 첩리의 명칭과 유형에 관한 연구」, 『대한가정학회지』 제35권 1호, 대한가정학회, 1997. | ||
+ | * 장인우, 「조선중기 솜텰릭(帖裏) 구성에 대하여 –순천김씨묘 갈색명주 솜누비 털릭 중심으로-」, 『服飾』 52권 8호, 한국복식학회, 2002. | ||
+ | * 홍나영, 「출토복식을 통해서 본 조선시대 남자 편복포의 시대구분」, 『服飾』 58권 5호, 한국복식학회, 2008. | ||
===더 읽을거리=== | ===더 읽을거리=== | ||
===유용한 정보=== | ===유용한 정보=== |
2017년 9월 14일 (목) 21:56 판
철릭 (帖裏) |
|
대표명칭 | 철릭 |
---|---|
한자표기 | 帖裏 |
이칭별칭 | 天益, 天翼, 粘裏, 添里, 綴翼 |
구분 | 의복 |
착용신분 | 왕, 왕세자, 백관 |
착용성별 | 남성 |
목차
정의
왕, 왕세자, 백관이 군대와 군사에 관한 일이 있을 때 주로 착용한 포(袍)로, 백관의 공복에 받침옷이나 백관의 편복으로도 착용한다.[1]
내용
몽골족의 옷에서 유래한 옷으로, 몽골어의 ‘Telig’을 음차한 것이기 때문에 한자로 ‘天益’, ‘天翼’, ‘帖裏’, ‘粘裏’, ‘添里’, ‘綴翼’ 등 다양한 표기가 나타난다. 상의와 치마[下裳]를 따로 재단한 다음 치마 윗부분에 주름을 잡아서 상의에 꿰매 이은 옷으로, 주립, 광다회, 목화와 함께 일습을 이루어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왕의 행행(行幸)이나 전쟁에 착용하였다. 양쪽 소매 혹은 한쪽 소매에 매듭단추를 달아 소매를 떼었다 붙였다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하여 활동에 편리하도록 하였다.[2]
시대에 따라 상의와 치마의 길이 비율이 달라져 상의와 치마를 연결한 허리선의 위치는 철릭의 시대를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상의와 하상의 비율을 보면 15세기에는 상의가 하상보다 길어 ‘상의:하상’의 비율이 1.2:1로 상의가 하상에 비해 길다. 16세기에는 1.25:1, 1:1, 1:1.22로 상의와 하상의 비례가 비슷해지면서 하상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18세기에는 1:1.72!2.28로 상의의 길이가 많이 길어졌으며, 19세기와 20세기에는 1:2.16~2.5, 1:3.58로 조선후기로 갈수록 상의에 비해 하상의 길이가 길어진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점차 상이 더 길어져 19세기 말에는 의와 상의 비율이 1:3.6에 이른다. 소매는 조선시대 복식의 흐름과 같이 후대로 갈수록 소매통이 넓어진다. 소매는 분리되지 않고 연속으로 붙어 있는 통수형고 분리형이 있는데, 길과 소매를 연결하는 방법은 시침과 단추, 끈 등이 있다. 헤지기 쉬운 어깨에 천을 덧대는 어깨바대는 모양에 따라 H형, U형, 一형이 있다. 치마의 허리부분 주름은 0.2㎝ 내외로 가늘게 잡기도 하고, 2~3㎝ 정도로 넓게 잡기도 한다.[3]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9세기에는 백관의 군복과 백관의 융복이 존재하나 군(軍)과 융(戎)의 의미가 동일하여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 소매가 넓은 철릭을 없애자는 상소도 등장한다.[4] 임진왜란 전 행행(行幸)에는 융복을 착용했는데, 정조대에는 군복을 입은 기록이 있어 융복이 군복으로 대체되어 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5] 순조대에는 융복과 군복 중 버려야한다면 군복을 폐지하자고 하였고,[6] 고종대에는 융복을 군복으로 대체하라는 기록도 있다.[7] 철릭은 백관의 융복의 하나이자 백관의 상복인 단령의 받침옷으로, 왕의 행차나 시위(侍衛) 시에 착용하였고 비상시에는 단령 등의 관복에 받쳐 입다 단령을 벗고 전투복으로서의 기능을 했던 옷이였다. 그러나 고종대 서양식 군복을 착용하면서 철릭도 사라지게 되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왕 | 철릭 | A는 B를 착용한다 | A ekc:wears B |
왕세자 | 철릭 | A는 B를 착용한다 | A ekc:wears B |
백관 | 철릭 | A는 B를 착용한다 | A ekc:wears B |
왕의 융복 | 철릭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왕세자의 융복 | 철릭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백관의 융복 | 철릭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철릭 | 주립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철릭 | 사모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철릭 | 목화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무연고묘 출토 철릭.[8]
이홍망(李弘望, 1572~1637)묘 출토 철릭.[9]
신경유(申景裕, 1581~1633)묘 출토 제복 하상.[10]
밀창군 이직(密昌君 李樴, 1677~1764)묘 출토 조복 상의[11]
윤용구(尹用求, 19세기) 전세유물. [12]
영상
주석
- ↑ 금종숙, 「朝鮮時代 철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132쪽.
- ↑ 금종숙, 「朝鮮時代 철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132~133쪽.
- ↑ 금종숙, 「朝鮮時代 철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133~143쪽.
- ↑ 『正祖實錄』 17년(1793) 10월 8일: 「兵曹參判林濟遠上疏」
- ↑ 『正祖實錄』 24년(1800) 3월 17일: 「禮曹判書李晩秀啓言」
- ↑ 『純祖實錄』 34년(1834) 4월 29일: 「左議政沈象奎啓言」
- ↑ 『高宗實錄』 20년(1883) 1월 28일: 「敎」
- ↑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 ↑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정사공신 신경유공 묘 출토복식』,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8, 20쪽.
- ↑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금종숙, 「朝鮮時代 철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 금종숙, 「조선시대 철릭의 형태 및 바느질법 연구-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김지혜ㆍ최정욱, 「철릭의 디자인 현대화에 관한 연구」, 『한복문화』 제11권 3호, 한복문화학회, 2008.
- 金贊珠, 「철릭에 關한 服飾史的 硏究 」,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文明姬, 「帖裏에 關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예경자, 「조선전기 철릭의 실증적 고찰」,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이순자, 「帖裏에 관한 再考論」, 『복식문화연구』 9권 2호, 복식문화학회, 2001.
- 이은주, 「철릭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한국의류학회지』 13권 4호, 한국의류학회, 1989.
- 이은주, 「철릭의 명칭에 관한 연구」, 『한국의류학회지』 12권 3호, 한국의류학회, 1988.
- 李恩珠, 「16세기 전기 철릭의 구성법 일례 -金欽祖(1461~1528)분묘 출토의 철릭을 중심으로-」, 『복식문화연구』 7권 2호, 복식문화학회, 1999.
- 장인우, 「조선시대 첩리의 명칭과 유형에 관한 연구」, 『대한가정학회지』 제35권 1호, 대한가정학회, 1997.
- 장인우, 「조선중기 솜텰릭(帖裏) 구성에 대하여 –순천김씨묘 갈색명주 솜누비 털릭 중심으로-」, 『服飾』 52권 8호, 한국복식학회, 2002.
- 홍나영, 「출토복식을 통해서 본 조선시대 남자 편복포의 시대구분」, 『服飾』 58권 5호, 한국복식학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