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포대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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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정보
 
{{사건정보
|대표명칭 = 진포대첩(鎭浦大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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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족기록화 사건 진포대첩 진포대첩 기념탑.jpg
|이칭별칭 = 진포해전(鎭浦海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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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view.do?treeId=04015&levelId=ti_015_0290 진포대첩 기념탑]", 영상이미지 속 우리 역사,
|시대 =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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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성격 =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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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우왕]] 8년 138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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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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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진포대첩'''은, 고려 말기인 [[우왕]] 6년(1380년)에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이 지휘하는 고려 수군이 한국의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사이 금강 하구인 [[진포]]에 상륙한 왜구의 전함을 함포 공격으로 불사르고 왜구의 후방 퇴각로를 끊은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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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년 고려 수군이 군산 앞바다에서 왜구를 상대로 크게 승리한 해전.<ref>김종수, "[http://gu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unsan&dataType=01&contents_id=GC05700448 진포 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군산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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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350년부터 왜구는 고려를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여 [[우왕]] 때에는 왜구의 침입이 절정을 이루었다. 왜구가 이같이 창궐한 것은 1333~1392년에 일본의 왕조가 남북으로 갈라져 전란이 지속됨에 따라 민간의 생활이 피폐해진데다가 중앙 권력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왜구는 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고려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수도인 개성까지 침입하여 왕조의 근간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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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왜구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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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왜구는 1223년(고종 10년) 처음 고려를 침입하여 이후 5년에 걸쳐 7차례를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지역에서 노략질을 자행하였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350년(충정왕 2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급격하게 늘어나 115회에 달했고, [[고려 우왕 | 우왕]] 연간(1375~1388)에는 278회에 이르렀다. 일본의 남북분단으로 전란이 지속됨에 따라 자신들의 생활환경이 피폐해지자, 눈을 고려로 돌려 노략질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view.do?treeId=04015&levelId=ti_015_029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C%A7%84%ED%8F%AC%EB%8C%80%EC%B2%A9%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C%A7%84%ED%8F%AC%EB%8C%80%EC%B2%A9%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C%A7%84%ED%8F%AC%EB%8C%80%EC%B2%A9%27%7C1%7C0%29+%7D 진포대첩 기념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고려 조정에서는 해상에서의 보딩(Boarding) 전술과 창칼을 잡고 휘두르는 단병접전에 뛰어난 왜구의 공격에 맞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구에 맞서기 위해 고려 조정은 수군력을 복구하는데 힘을 기울였고, [[우왕]] 3년(1377년)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화통도감(火㷁都監)]] 을 설치하고 화약과 각종 대포 및 이를 실을 수 있는 전함 개량에 나섰다. [[최무선]]의 [[화포]] 개발은 고려가 왜구에 맞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게 해준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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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포를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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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년(우왕 6) 8월 진포에 왜구들이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곡식을 노략질 하기 위해 군산 방면으로 침입해 왔으며, 군사의 규모는 대체로 10,000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잡아매고, 일부 병력을 남겨둔 채 육지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비롯한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ref>김종수, "[http://gu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unsan&dataType=01&contents_id=GC05700448 진포 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군산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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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정부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의 지휘 하에 화약 무기를 적재한 신형 함선 100척을 출동시켜 왜선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고려 함선들은 진포에 이르러 밧줄로 서로 묶여있는 적함을 향해 일제히 화전과 화통, 화포를 사용해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화공을 통해 고려 함대는 적선 500척을 모조리 파괴·소각시키고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하였다.<ref>김종수, "[http://gu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unsan&dataType=01&contents_id=GC05700448 진포 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군산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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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와 평가===
1380년 8월 왜구들은 500여 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오늘날의 [[금강]] 어구에 해당하는 [[진포]]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잡아매고, 인근 주, 군 고을로 흩어져 들어가 곳곳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벌였다. [[고려사|《고려사》]] 및 [[고려사절요|《고려사절요》]]는 이때의 모습에 대해 ''시체가 산과 들에 덮였고 배로 옮기다 땅에 떨어진 쌀만 한 자나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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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은 고려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화포와 화통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공격한 최초의 해상전투로 이를 기반으로 왜구 토벌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또한 진포대첩의 승리를 계기로 왜구의 침입이 점차 줄어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view.do?treeId=04015&levelId=ti_015_029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C%A7%84%ED%8F%AC%EB%8C%80%EC%B2%A9%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C%A7%84%ED%8F%AC%EB%8C%80%EC%B2%A9%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C%A7%84%ED%8F%AC%EB%8C%80%EC%B2%A9%27%7C1%7C0%29+%7D 진포대첩 기념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이에 조정에서는 [[나세]]를 상원수로, [[심덕부]],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진포]]로 파견하여 화약 무기를 적재한 신형 함선 100척을 거느리고 왜구를 진압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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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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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고려 함선들은 [[진포]]에 이르러 밧줄로 서로 묶여있는 적함을 향해 일제히 [[화포]]와 [[화전]], [[화통]]을 사용해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화공을 통해 고려 함대는 적선 500척을 모조리 파괴·소각시키고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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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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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으로 인해 해안에 정박하여 있다가 [[화포]]로 모든 배를 잃은 왜구들은 사실상 퇴로를 차단당하였다. 그들은 상주, 영동, 옥주 등지로 달아나면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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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포대첩]] || [[진포]] || A는 B에서 일어났다 || A edm:happenedAt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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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고려 정부는 [[조선 태조]]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5413 양광도]·전라도·경상도 삼도 순찰사로 임명하고, 왜구 토벌 명령을 내려, 남원 운봉에서 왜구들을 소탕하였다. 이것이 [[황산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왜구는 단지 70여 명 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으나 곧 토벌되었다. [[진포]]에 침입할 때 왜구의 수가 10,000명이 넘었는데, '''진포대첩'''과 '''황산대첩'''에 의해 전멸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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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덕부]] || [[진포대첩]]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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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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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세]] || [[진포대첩]]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진포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로,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진포대첩'''으로 [[조선 태조]]의 [[황산대첩]]이 가능하였고, 그는 고려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아 새 왕조를 개창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진포대첩'''이 조선 왕조 개창에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진포대첩'''의 전술은 조선 수군의 전술 모델이 되었다. 200년 이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순신]] 장군 역시 같은 전술을 사용할 정도로 선진적 전술이었던 것이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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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 || [[황산대첩]]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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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에 기록되어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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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에 기록되어있다||[[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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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011226 || 126.756783 || [[진포대첩 기념탑]][[금강호시민공원]]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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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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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틀 삽입 그림: 북한 개성 고려박물관 소장 민족기록화 작품 「진포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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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https://ko.wikipedia.org/wiki/%EC%A7%84%ED%8F%AC_%ED%95%B4%EC%A0%84 '진포 해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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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mok Jo - 진포대첩(게시일:2015년 12월 02일)'''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 '진포 대첩',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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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jMWTrfdT5u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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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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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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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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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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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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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자원
 +
#* 김종수, "[http://gu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unsan&dataType=01&contents_id=GC05700448 진포 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군산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08&index_id=cp02081339&content_id=cp020813390001&search_left_menu=4 진포대첩]",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41383 진포해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view.do?treeId=04015&levelId=ti_015_029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EC%A7%84%ED%8F%AC%EB%8C%80%EC%B2%A9%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EC%A7%84%ED%8F%AC%EB%8C%80%EC%B2%A9%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EC%A7%84%ED%8F%AC%EB%8C%80%EC%B2%A9%27%7C1%7C0%29+%7D 진포대첩 기념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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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민족/교열요청]]

2017년 10월 3일 (화) 15:29 판

진포대첩(鎭浦大捷)
"진포대첩 기념탑", 영상이미지 속 우리 역사,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대표명칭 진포대첩
한자표기 鎭浦大捷
이칭 진포해전
유형 전투
시대 고려
날짜 1380년 8월(우왕 6년)
관련인물 심덕부, 나세, 최무선


정의

1380년 고려 수군이 군산 앞바다에서 왜구를 상대로 크게 승리한 해전.[1]

내용

고려말 왜구의 침입

고려시대의 왜구는 1223년(고종 10년) 처음 고려를 침입하여 이후 5년에 걸쳐 7차례를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지역에서 노략질을 자행하였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350년(충정왕 2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급격하게 늘어나 115회에 달했고, 우왕 연간(1375~1388)에는 278회에 이르렀다. 일본의 남북분단으로 전란이 지속됨에 따라 자신들의 생활환경이 피폐해지자, 눈을 고려로 돌려 노략질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2]

화포를 사용

1380년(우왕 6) 8월 진포에 왜구들이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곡식을 노략질 하기 위해 군산 방면으로 침입해 왔으며, 군사의 규모는 대체로 10,000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잡아매고, 일부 병력을 남겨둔 채 육지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비롯한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3]
고려 정부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의 지휘 하에 화약 무기를 적재한 신형 함선 100척을 출동시켜 왜선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고려 함선들은 진포에 이르러 밧줄로 서로 묶여있는 적함을 향해 일제히 화전과 화통, 화포를 사용해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화공을 통해 고려 함대는 적선 500척을 모조리 파괴·소각시키고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하였다.[4]

의의와 평가

진포대첩은 고려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화포와 화통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공격한 최초의 해상전투로 이를 기반으로 왜구 토벌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또한 진포대첩의 승리를 계기로 왜구의 침입이 점차 줄어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진포대첩 진포 A는 B에서 일어났다 A edm:happenedAt B
심덕부 진포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나세 진포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최무선 진포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화포 진포대첩 A는 B에 사용되었다 A ekc:isUsedIn B
화포 최무선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진포대첩 황산대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성계 황산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011226 126.756783 진포대첩 기념탑금강호시민공원에 위치한다

시각자료

영상

  • Hyunmok Jo - 진포대첩(게시일:2015년 12월 02일)

주석

  1. 김종수, "진포 대첩", 『디지털군산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진포대첩 기념탑",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김종수, "진포 대첩", 『디지털군산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종수, "진포 대첩", 『디지털군산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진포대첩 기념탑",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김종수, "진포 대첩", 『디지털군산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진포대첩",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 "진포해전",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진포대첩 기념탑",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