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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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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尹斗緖)는 조선 중, 후기의 학자이자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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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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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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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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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尹斗緖)의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제(恭齎)로 가사문학의 대가인 [[윤선도 |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자이다. 윤두서는 1668년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문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진법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15세인 1662년 전주이씨와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으나 7년 후 부인과 사별했고, 이후 완산이씨를 맞아 7남2녀를 더 두었다. <ref>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5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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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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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숙종 29)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는 노론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한 시기였다. 특히 윤두서의 증조부인 [[윤선도]]는 남인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렬히 노론을 공격하여 이후 노론이 집권한 조선 후기 내내 그 후손들은 자신을 드러내기조차 어려웠다. 게다가 윤두서는 당쟁의 와중에 형을 비롯한 친구들과 함께 역모를 하였다는 모함을 받았다. 결국 무고가 밝혀지기는 했지만 정계에 환멸을 느끼고 이후로는 벼슬을 멀리하고 일생을 오로지 서화와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ref>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6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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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궁한 생활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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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집안마저기울어져 생계까지 위헙을받게 되자 47세에 전 가족을 이끌고 해남으로 이주하게 된다. 해남 이거 후에는 생활의 어려움과 건강 쇠약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1715년(숙종 41) 11월 26일 백련동의 고택에서 감기를 앓다가 4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ref>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6-7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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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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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활동의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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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는 조선 중~후기의 전환기에 활동한 예술가였는데 그의 이러한 예술활동은 당시 조선의 사회, 경제적 분위기와 관련이 깊었다. 당시 조선은 국가경제가 부유해지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백성들의 생활도 윤택해 졌으며 이것이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또한학문에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연행을 다녀온 선비들에 의해 도입된 과학적 지식을 동반한 서역문물, 즉 과학기계와 서학의 서적이 수입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양란을 겪은 왕실의 기반이 흔들리자 이에 자극을 받아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실학 사상이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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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사상의 대두와 예술계의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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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대한 의의를지니고 있는데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한 실학의 대두와 변천은 당시 미술의 추이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실학이 끼친 영향은 생활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을 소재로 선택하여 한국적 회화와 서민 예술을 탄생시킨 것이다. 즉, 성리학적 인식방법을 떠나 새로운 기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창안토록 자극하여 회화 방법에 변화를 주었다. <ref>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3-4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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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화단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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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안견파 화풍 | 안견파화풍(安堅派畵風)]]과 [[절파화풍 | 절파화풍(浙派畵風)]]이 크게 유행하였고 [[김식 | 김식(金埴)]], [[조속 | 조속(趙涑)]] 등은 이러한 절파의 선을 기본으로 따르면서도 변형과 자기화, 그리고 공백확대를 위한 배경축소 등 거의 중국풍 화풍을 벗어나 한국적 색채의 한국화파를 개척하였다.<ref>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4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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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 후기 화풍의 변화와 윤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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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의 등장 이전까지는 외계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생정신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관념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조선 각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안견, 김시, 이징 등의화가들모두 사실적인 거리가 먼 작품세계를 지향했다. 이는 사대부를 주축으로 하는 당시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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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의 화풍은 이러한 기존의 흐름이나 경향에 대한 철저한 반성 하에 완성될 수 있었다. 앞서 말한방와 같이 숙종대 신문물의 도입과 이를 수용하는 것에 대한 고민은 예술계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대의 회화계에 공재를 선구로 하여 외계의 대상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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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생정신이 새롭게 대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ref>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8-9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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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의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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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는 무릇 점 하나, 획 하나를 소홀하게 지나쳐버리지 않았다고 하듯이 그림에 임하는 태도는 주도면밀함 그 자체였다. 윤두서는 그림 그리기에 앞서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털끝만큼도 참 모습에 의심이 없는 후에야 붓을 들었으며 이런 정신을 다른 모든 그림에서도 똑같이 실천했다. 이렇듯 공재는 사실성을 철저하게 추구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앞선 시대의 비사실적인 그림에 대한 도전이자 새로운 창조였다. 그는 앞 시대를 반성하고 사생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출해 냈던 것이다.<ref>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8-9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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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풍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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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을 보면 세 가지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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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고씨화보(顧氏畵譜)」에 나와 있는 테마를 가지고 그린 그림으로,「청죽화사(聽竹畵史)」에 보면 옛날 동국(東國)의 그림은 다 옹졸하고 중화의 고급 그림은 모르는데 윤공재(尹恭齎)에 와서 비로소 문을 열었다 했다. 이것은 화보식 그림으로 보고 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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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화보와 상관없는 영모(翎毛)와 산수인데, 연기(年紀)가 들어 있는 면이나 여느 그림은 담백, 담담하여 화보 그림과는 전혀 다른 아취(雅趣)가 풍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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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실사(實寫)의 그림인데, 이것은 사실주의와 관계되는 것들로 중국의 악기를 들여다보고 실제로 그것을 제작하였다는 것과 천문(天文)은 꼭 바깥에 나가서 성숙(星宿)을 보며 비교하면서 연구 했다는 것, 그러한 태도는 실사구시의 정신인 것이다. 즉 실학적인 요소가 그림에 반영되었다는 것을 말한다<ref>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11-12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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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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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 예로는 「자화상」으로, 무수한 수염을 한 올 한 올 섬세한 필선으로 정확하게 그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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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심지어 코 속의 털까지도 세밀하게 그려서 그의 사실성 추구의 극단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ref>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10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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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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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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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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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인물]]

2017년 8월 4일 (금) 06:25 판

윤두서(尹斗緖)
대표명칭 윤두서
한자표기 尹斗緖
생몰년 1668년-1715년
본관 해남
공제(恭齎)
효언(孝彦)
출생지 해남
사망지 해남
시대 조선
국적 조선


정의

윤두서(尹斗緖)는 조선 중, 후기의 학자이자 화가이다.

내용

생애

  • 출생과 가족관계

윤두서(尹斗緖)의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제(恭齎)로 가사문학의 대가인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자이다. 윤두서는 1668년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문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진법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15세인 1662년 전주이씨와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으나 7년 후 부인과 사별했고, 이후 완산이씨를 맞아 7남2녀를 더 두었다. [1]

  • 정치활동

1693년(숙종 29)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는 노론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한 시기였다. 특히 윤두서의 증조부인 윤선도는 남인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렬히 노론을 공격하여 이후 노론이 집권한 조선 후기 내내 그 후손들은 자신을 드러내기조차 어려웠다. 게다가 윤두서는 당쟁의 와중에 형을 비롯한 친구들과 함께 역모를 하였다는 모함을 받았다. 결국 무고가 밝혀지기는 했지만 정계에 환멸을 느끼고 이후로는 벼슬을 멀리하고 일생을 오로지 서화와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2]

  • 곤궁한 생활과 죽음

이러한 상황에서 집안마저기울어져 생계까지 위헙을받게 되자 47세에 전 가족을 이끌고 해남으로 이주하게 된다. 해남 이거 후에는 생활의 어려움과 건강 쇠약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1715년(숙종 41) 11월 26일 백련동의 고택에서 감기를 앓다가 4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3]

작품활동

  • 작품 활동의 시대적 배경

윤두서는 조선 중~후기의 전환기에 활동한 예술가였는데 그의 이러한 예술활동은 당시 조선의 사회, 경제적 분위기와 관련이 깊었다. 당시 조선은 국가경제가 부유해지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백성들의 생활도 윤택해 졌으며 이것이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또한학문에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연행을 다녀온 선비들에 의해 도입된 과학적 지식을 동반한 서역문물, 즉 과학기계와 서학의 서적이 수입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양란을 겪은 왕실의 기반이 흔들리자 이에 자극을 받아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실학 사상이 대두되었다.

  • 실학 사상의 대두와 예술계의 추이

이러한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대한 의의를지니고 있는데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한 실학의 대두와 변천은 당시 미술의 추이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실학이 끼친 영향은 생활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을 소재로 선택하여 한국적 회화와 서민 예술을 탄생시킨 것이다. 즉, 성리학적 인식방법을 떠나 새로운 기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창안토록 자극하여 회화 방법에 변화를 주었다. [4]

  • 조선 중기 화단의 특징

초기의 안견파화풍(安堅派畵風) 절파화풍(浙派畵風)이 크게 유행하였고 김식(金埴), 조속(趙涑) 등은 이러한 절파의 선을 기본으로 따르면서도 변형과 자기화, 그리고 공백확대를 위한 배경축소 등 거의 중국풍 화풍을 벗어나 한국적 색채의 한국화파를 개척하였다.[5]

  • 조선 중, 후기 화풍의 변화와 윤두서

윤두서의 등장 이전까지는 외계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생정신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관념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조선 각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안견, 김시, 이징 등의화가들모두 사실적인 거리가 먼 작품세계를 지향했다. 이는 사대부를 주축으로 하는 당시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윤두서의 화풍은 이러한 기존의 흐름이나 경향에 대한 철저한 반성 하에 완성될 수 있었다. 앞서 말한방와 같이 숙종대 신문물의 도입과 이를 수용하는 것에 대한 고민은 예술계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대의 회화계에 공재를 선구로 하여 외계의 대상을 있 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생정신이 새롭게 대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6]

  • 윤두서의 화풍

윤두서는 무릇 점 하나, 획 하나를 소홀하게 지나쳐버리지 않았다고 하듯이 그림에 임하는 태도는 주도면밀함 그 자체였다. 윤두서는 그림 그리기에 앞서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털끝만큼도 참 모습에 의심이 없는 후에야 붓을 들었으며 이런 정신을 다른 모든 그림에서도 똑같이 실천했다. 이렇듯 공재는 사실성을 철저하게 추구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앞선 시대의 비사실적인 그림에 대한 도전이자 새로운 창조였다. 그는 앞 시대를 반성하고 사생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출해 냈던 것이다.[7]

  • 화풍의 특징

그의 그림을 보면 세 가지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고씨화보(顧氏畵譜)」에 나와 있는 테마를 가지고 그린 그림으로,「청죽화사(聽竹畵史)」에 보면 옛날 동국(東國)의 그림은 다 옹졸하고 중화의 고급 그림은 모르는데 윤공재(尹恭齎)에 와서 비로소 문을 열었다 했다. 이것은 화보식 그림으로 보고 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둘째, 화보와 상관없는 영모(翎毛)와 산수인데, 연기(年紀)가 들어 있는 면이나 여느 그림은 담백, 담담하여 화보 그림과는 전혀 다른 아취(雅趣)가 풍기는 것이다. 셋째, 실사(實寫)의 그림인데, 이것은 사실주의와 관계되는 것들로 중국의 악기를 들여다보고 실제로 그것을 제작하였다는 것과 천문(天文)은 꼭 바깥에 나가서 성숙(星宿)을 보며 비교하면서 연구 했다는 것, 그러한 태도는 실사구시의 정신인 것이다. 즉 실학적인 요소가 그림에 반영되었다는 것을 말한다[8]

  • 대표작

이런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 예로는 「자화상」으로, 무수한 수염을 한 올 한 올 섬세한 필선으로 정확하게 그렸으 며, 심지어 코 속의 털까지도 세밀하게 그려서 그의 사실성 추구의 극단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9]

주석

  1. 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5쪽
  2. 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6쪽
  3. 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6-7쪽
  4. 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3-4쪽
  5. 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4쪽
  6. 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8-9쪽
  7. 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8-9쪽
  8. 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11-12쪽
  9. 최혜진, 「공재 윤두서 연구 : 인물화와 풍속화에 나타난 인물표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