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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지증대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 | |
− |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 ||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문화재청 |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문화재청 | ||
2017년 6월 13일 (화) 14:30 판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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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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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for Buddhist Monk Jijeung at Bongamsa Temple, Mungyeong |
한자 |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
이칭 |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
주소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제315호 |
문화재 지정일 | 2010년 01월 04일 |
찬자 | 최치원(崔致遠) |
서자 | 혜강(慧江) |
각자 | 혜강(慧江) |
서체 | 행서(行書) |
승려 | 도헌(道憲) |
건립연대 | 924년 |
승탑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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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鳳巖寺)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지증대사 도헌(智證大師 道憲, 824-882)의 탑비.
내용
개요
이 비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1월 4일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었으며,[1] 비신의 높이는 2.73m, 너비는 l.64m, 두께는 23cm이다.[2]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가 완전히 보존되어 있고, 귀부의 머리 부분은 이미 용두화(龍頭化)되어 있으며,[3]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이다.[4]
비문에 쓰여진 글씨는 자경 2㎝ 크기의 행서(行書)로 왕희지(王羲之) 글씨의 영향을 받고 있다.[5]
이 탑비는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지증대사(智證大師)의 것이다.[6] 지증대사가 882년(헌강왕 8)에 봉암사에서 41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헌강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내리고[7] 885년에 왕명으로 최치원(崔致遠)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하였고,[8] 그 뒤 30여년이 지난 924년(경애왕 1)에 분황사(芬皇寺) 승려 혜강(慧江)이 비문을 쓰고 이를 새겨 건립하였다.[9] 이 비문은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10]
비문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지증대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문화재청
신라시대 토지소유관계, 개인 소유의 논밭(田莊) 성격 등을 연구할 때에도 기초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한국금석문
저자 최치원은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육이(六異, 여섯 가지의 신기하고 기이한 사실)와 육시(六是,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위키
이밖에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의 정보와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도 적혀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문경 봉암사 | A는 B에 있다 | |
헌강왕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도헌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혜강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혜강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사산비명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각자료
영상
- OPEN TV, "(3D 입체영상)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YouTube, 게시일: 2016년 02월 08일.
주석
- ↑ 박문각 시사상식편집부,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2014.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시사상식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두산백과』online . -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두산백과』online . - ↑ 정영식,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영식,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정영식,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정영식,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