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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3일 (화) 13:47 판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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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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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for Buddhist Monk Jijeung at Bongamsa Temple, Mungyeong |
한자 |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
이칭 |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
주소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제315호 |
문화재 지정일 | 2010년 01월 04일 |
찬자 | 최치원(崔致遠) |
서자 | 혜강(慧江) |
각자 | 혜강(慧江) |
서체 | 행서(行書) |
승려 | 도헌(道憲) |
건립연대 | 924년 |
승탑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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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鳳巖寺)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지증대사 도헌(智證大師 道憲, 824-882)의 탑비.
내용
개요
이 비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1월 4일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었다. 비신의 높이는 2.73m이고, 너비는 l.64m이며, 두께는 23cm이다.[1]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가 완전히 보존되어 있고, 귀부의 머리 부분은 이미 용두화(龍頭化)되어 있으며,[2]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이다.[3]
비문에 쓰여진 글씨는 자경 2㎝ 크기의 행서(行書)로 왕희지(王羲之) 글씨의 영향을 받고 있다.[4]
탑비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대사는 882년(헌강왕 8) 41세의 나이로 입적하였고, 헌강왕은 885년에 왕명으로 최치원(崔致遠)에게 진경대사의 비문을 짓게 하였다.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하였고, 탑비는 그 보다 훨씬 늦은 924년(경애왕 1)에 건립되었다. 비문에서 신라불교사를 크게 3기로 구분하였고, 제3기를 선종의 시대라고 정리하였다. 진경대사는 일찍이 신라사회에 수입된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하여 신라 하대에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한 남종선과 구별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 선종사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토지소유관계, 전장(田莊)의 성격 등을 연구할 때에도 기초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한국금석문
최치원이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을 현창하기 위해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찬술한 비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924년(경애왕 1)에 세워진 것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 경내에 있다.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로서 선의 전래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에 관한 기록이 많다. 도헌이 882년(헌강왕 8)에 봉암사에서 입적하자 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내리고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비문에 적힌 최치원의 관직명으로 보아 89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30년이 지난 924년에 분황사 승려 혜강(慧江)이 비문을 쓰고 이를 새겨 건립하였다.
최치원이 지은 본 비문에는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의 상황을 전하는 귀중한 기록을 담고 있다. 우선 비문에는 “(도헌의) 법의 계보를 보면, 당의 제4조 도신(道信, 580∼651)을 오대 스승으로 하여 점차 동쪽의 이 땅에 법을 전하여 왔는데, 법맥을 위로 따져보면 쌍봉의 제자는 법랑, 손제자는 신행, 증손제자는 준범, 현손제자는 혜은, 내손제자가 대사이다.[法胤唐四祖爲五世父 東漸于海 遡游數之 雙峰子法朗 孫愼行 曾孫遵範 玄孫慧隱 來孫大師也]”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선을 전래한 사람은 7∼8세기경 법랑(法朗)으로서, 제4조 도신(혹은 쌍봉(雙峯)이라고도 함)의 법을 전했다고 한다. -민백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문화재청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 육시(六是)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위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등이 전형적인 신라 말기의 탑비 조성 양식을 보여주는 데다 비문도 온전히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비문은 지증대사의 일생을 여섯 가지 신이한 사실 ‘육이(六異)’와 여섯 가지 훌륭한 행적 ‘육시(六是)’로 정리하는 등 독특한 전기 서술법을 보여준다. 이밖에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의 정보와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도 적혀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는 본래 보물 제138호로 지정돼 있다가, 2009년 12월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됐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비문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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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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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문경 봉암사 | A는 B에 있다 | |
헌강왕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도헌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혜강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혜강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사산비명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각자료
영상
- OPEN TV, "(3D 입체영상)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YouTube, 게시일: 2016년 02월 08일.
주석
-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두산백과』online . -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두산백과』online . - ↑ 정영식,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영식,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