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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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귀부(龜趺)]]와 [[이수|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 이수에는 보주를 다투는 반룡(蟠龍: 승천하지 아니한 용)이 조각되었고,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전액(篆額)이 양각되었으며, 그 위로 앙련판(仰蓮瓣) 위에 보주를 얹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098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수의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1,00470000,38&flag=Y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문화재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귀부|귀부(龜趺)]]와 [[이수|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 이수에는 보주를 다투는 반룡(蟠龍: 승천하지 아니한 용)이 조각되었고,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전액(篆額)이 양각되었으며, 그 위로 앙련판(仰蓮瓣) 위에 보주를 얹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098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수의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1,00470000,38&flag=Y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문화재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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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감선사 탑비의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문|비문]]은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비면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1725년(조선 영조 1)에 목판에 그대로 본떠 새긴 비문이 있어 887년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글씨는 2cm 정도의 해서로 위아래로 긴 짜임새를 하고 있다.<ref>"[http://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44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소장품』<sup>online</sup></online></html>, 국립중앙박물관</ref>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1936년 7월 지진으로 인하여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가 일부 훼손되었다.<ref>" | 진감선사 탑비의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문|비문]]은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비면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1725년(조선 영조 1)에 목판에 그대로 본떠 새긴 비문이 있어 887년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글씨는 2cm 정도의 해서로 위아래로 긴 짜임새를 하고 있다.<ref>"[http://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44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소장품』<sup>online</sup></online></html>, 국립중앙박물관</ref>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1936년 7월 지진으로 인하여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가 일부 훼손되었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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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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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혜소|진감선사 혜소(慧昭)]]는 최씨로 804년(애장왕 5)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편승하여 당나라의 [[신감|신감대사(神監大師)]]에 의하여 중이 되었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신라 흥덕왕|흥덕왕]] 5) 귀국하여 역대왕들의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하동 쌍계사|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 + | [[혜소|진감선사 혜소(慧昭)]]는 최씨로 804년(애장왕 5)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편승하여 당나라의 [[신감|신감대사(神監大師)]]에 의하여 중이 되었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신라 흥덕왕|흥덕왕]] 5) 귀국하여 역대왕들의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하동 쌍계사|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문을 짓고 쓴 이는 당대의 대표적 문인인 [[최치원|최치원(崔致遠)]]으로, 특히 [[최치원]]의 [[사산비명|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098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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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7년 6월 4일 (일) 21:18 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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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
한자 |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이칭 |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
주소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47호 |
문화재 지정일 | 1962.12.20 |
찬자 | 최치원(崔致遠) |
서자 | 최치원(崔致遠) |
각자 | 환영(奐榮) |
서체 | 전서(篆書) |
승려 | 혜소(慧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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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 774-850)의 탑비.
내용
개요
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하다. 887년(진성여왕 1)에 건립되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진감선사 혜소(慧昭)의 행적을 기술하고 있다. 헌강왕의 명령으로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쓰고, 환영 스님이 비문을 새겼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 이수에는 보주를 다투는 반룡(蟠龍: 승천하지 아니한 용)이 조각되었고,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전액(篆額)이 양각되었으며, 그 위로 앙련판(仰蓮瓣) 위에 보주를 얹었다.[1] 이수의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2]
진감선사 탑비의 비문은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비면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1725년(조선 영조 1)에 목판에 그대로 본떠 새긴 비문이 있어 887년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글씨는 2cm 정도의 해서로 위아래로 긴 짜임새를 하고 있다.[3]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1936년 7월 지진으로 인하여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가 일부 훼손되었다.[4]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
진감선사 혜소(慧昭)는 최씨로 804년(애장왕 5)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편승하여 당나라의 신감대사(神監大師)에 의하여 중이 되었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흥덕왕 5) 귀국하여 역대왕들의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문을 짓고 쓴 이는 당대의 대표적 문인인 최치원(崔致遠)으로, 특히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5]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진감선사 혜소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하동 쌍계사 | A는 B에 있다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887년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887년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환영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사산비명 | A는 B에 포함된다 | |
신라 헌강왕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 887년 |
시각자료
가상현실
- 차후 있을 답사 후 보완..
갤러리
영상
- [주요 뉴스] KBS뉴스9 경남 – 지진 시대, 문화재 보호 `고심`(2016.10.11.화)
주석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문화재 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 稀有(희유)의 珍事實(진사실) 被害六日(피해육일)만에判明(판명)",『동아일보』, 작성일: 1936년 7월 11일
- ↑ 김세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쌍계사 진감선사비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27-152쪽.
-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88-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