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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7일 (화) 18:16 판
김언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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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언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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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 하대의 관리·서예가.
개요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헌안왕의 명을 받아 다약(茶藥)을 받들고 가서 그를 맞았다. 그 뒤 체징이 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한 후에는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어 사재(私財)로 철 2,500근을 사서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한 구를 만들어 봉헌(奉獻)하는 등 선종구산 중 가지산파의 후원에 크게 힘썼다.[1]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머리에서 7행까지는 김원(金薳)이 해서(楷書)로 썼고, 7행의 선(禪)자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로 썼다.[2]
논쟁
821년(헌덕왕 13) 신라인으로는 처음으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김운경(金雲卿)과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김언경과 김운경은 양자의 활동 상황을 감안할 때 별개의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경명왕비장사택(長沙宅)의 조부인 이찬(伊飡) 김수종(金水宗) 또는 김수종(金遂宗, 邃宗)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3]
같이 보기
주석
- ↑ "김언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 ↑ "김언경",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 ↑ "김언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