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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경종실록』 권5, 경종1년(1721), 12월 6일(임술),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112006_001 조성복과 그 무리들을 벌할 것을 청하는 박필몽·이진유·이명의 등의 상소],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2일 | <ref>『경종실록』 권5, 경종1년(1721), 12월 6일(임술),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112006_001 조성복과 그 무리들을 벌할 것을 청하는 박필몽·이진유·이명의 등의 상소],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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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일 (화) 16:16 판
광산김씨 상언 | |
영문명칭 | An appeal to king Yeongjo from Kim of Gwangsan, a wife of Yi Yimyeong |
---|---|
작자 | 광산김씨 |
간행시기 | 1726년 |
소장처 | 국립한글박물관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79.0×153.5㎝ |
판본 | 필사본 |
수량 | 1장 |
표기문자 | 한글 |
정의
1727년 10월에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의 처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영조에게 손자 이봉상(李鳳祥)과 시동생 이익명(李益命)의 구명을 호소하며 올린 상언(上言)이다.
내용
1727년 10월에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의 처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영조에게 손자 이봉상(李鳳祥)과 시동생 이익명(李益命)의 구명을 호소하며 올린 상언(上言)이다. 광산김씨는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의 딸이며, 남편 이이명은 신임옥사(辛壬獄事) 때 목호룡의 고변으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김창집·이건명·조태채와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집권하여 이이명이 복권되었지만,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소론이 집권하자 신임옥사 때 익사한 것으로 위장하고 도망간 이봉상은 다시 투옥되었다. 또한 이이명의 동생 이익명은 이봉상의 피신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이에 광산김씨는 영조에게 상언을 올려 이봉상을 피신시킨 것은 자신이 한 일이므로 손자 이봉상과 시동생 이익명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1]
부연설명
당시 1721년(경종 1)부터 1728년(영조 5)까지 약 5년간, 경종과 영조의 왕의 계승에 따른 소론 과 노론 두 파의 갈등 때문에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문제의 원인은 숙종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바로 장희빈과 인현왕후 시기 장희빈이 몰락 한 후 그녀를 지지했던 남인세력 처리를 두고 서인 집단이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이 문제는 숙종 재위시기 여러가지 사화 형태로 나타났으며, 숙종 자신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집권하는 당의 운명이 자주 바뀌었다. 숙종이 세상을 떠난 후 장희빈 소생인 경종과 인현왕후을 따르는 숙빈 최씨 소생인 영조의 붕당 싸움으로 확대되면서, 광산김씨 상언의 내용이 연관되게 된 것이다. 당시 소론이 지지하는 군주는 경종 이었고, 반대로 노론은 영조을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이 세상을 떠난후 경종이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노론세력이 경종의 병약함과 아직 후사가 없는 것을 이유로 영잉군을 세자(世弟)로 하자고 경종에게 주청 하였다. 경종을 따르는 소론은 당연히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경종 자신이 허락하는 방향으로 가게되어 사건이 일단락 되는 듯 보였다. [2]
그러나 노론 중에서 조성복이 이번에는 영잉군(영조)이 대리청정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태는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경종을 따르는 소론인 경우 "이것은 역모이다." 하며 노론을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시작했고, 경종은 소론의 대리청정 반대와 노론의 표면적인 반대를 이용하면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갔고, 영잉군은 사태 변화를 주시하면서 대리청정 반대를 했기 때문에 경종이 원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경종이 저울질 하던 상황에서 노론이 덥석 대리청정을 수용하였고, 소론 세력인 우상 조태구가 독대를 하여 경종이 대리청정을 그만두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노론은 다급해져서 한밤중에 궁으로 달려와 표면적인 반대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조태구와 같이 대리청정을 반대하였다. 그런데 다시 소론쪽에서 이 사태를 두고 노론의 책임을 묻자, 다시 노론은 내관이나 우상 조태구의 궁중 예법의 문제를 들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경종은 노론의 책임회피식 언사가 무례하다고 질책하고, 노론의 영수들을 파직시켜버린다. 그리고 1년 후 목호룡 이 고변하여 노론 세력은 참형과 유배로 정계에서 축출되는데 그때 광산김씨 상언에서 언급된 것 처럼 이이명은 죽음을 맞이하고 손자 이봉상은 도망을 가게 된 것이다. [3]
하지만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즉위하자, 사태는 또 바뀌기 시작한다. 물러난 노론 대신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신원을 회복시켰으며, 목호룡과 김일경 등 소론 강경파를 정계에서 축출한 것이다. 영조는 붕당 정치 속에서 특정 당이 정치를 좌지우지 하는 것을 싫어 했음으로, 소론과 노론의 균형을 맞추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노론은 정계에서 쫓겨난 소론 강경파 뿐만 아니라 잔당까지 다 없애버리려 했기 때문에, 영조는 도저히 용납 할 수 없었고 결국 1727년 정미환국이 일어나 일부 소론을 다시 기용하고 노론 대신들을 다시 내처버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 여파로 다시 이익명과 이봉상에게 화가 밀려오자 광산김씨는 광산김씨 상언을 올려 영조의 분노를 가라앉게 하려 했던 것이다. [4]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광산김씨 상언 | 광산김씨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이이명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영조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이봉상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이익명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김창집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이건명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조태채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노론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서론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신임옥사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정미환국 | A는 B를 ~했다 | |
광산김씨 상언 | 국립한글박물관 | A는 B를 ~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726 | 광산김씨 상언은 간행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21177 | 126.980935 | 광산김씨 상언는 국립한글박물관에 소장되었다. |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66~167쪽.
- ↑ 『경종실록』 권4, 경종1년(1721), 8월 21일(기묘), 2번째 기사, 연잉군을 궐내에 들어와 거처하게 하고 위호를 왕세제로 결정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2일 - ↑ 『경종실록』 권5, 경종1년(1721), 12월 6일(임술), 1번째 기사, 조성복과 그 무리들을 벌할 것을 청하는 박필몽·이진유·이명의 등의 상소,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2일 - ↑ 『영조실록』 권12, 영조3년(1727), 7월 5일(기미), 1번째 기사, 다섯 사람의 소와 관련해 민진원·이관명 등 1백 1인을 파면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5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