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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9일 (토) 08:56 판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
영문명칭 | Kim Seongil's Korean letter to his wife |
---|---|
작자 | 김성일 |
작성시기 | 1592년 |
소장처 | 의성김씨 학봉종택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31.2×43.2㎝ |
판본 | 필사 |
수량 | 1장 |
표기문자 | 한글 |
목차
정의
임진왜란 시 경상우도관찰사로 진주목 일대를 지휘하며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인 1592년 12월 말에 아내 안동권씨(1538-1623)에게 쓴 편지이다.
내용
경상우도감사로 부임하여 임지(任地)인 진주로 이동하는 중에 경남 산음현(현 산청)에 잠시 머무르던 학봉 김성일(1538-1593)이 1592년(선조25) 12월 24일에 안동 본가에서 장모를 모시고 있는 아내 안동권씨(1538-1623)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 끝에 발신일을 '서달 스믈나한날'로 적었고 발신자 표시에는 '김'이라 했으며, 봉투에는 '內簡'과 '右監司宅 안동납실'이라고 적은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하는 학봉 김성일이 쓴 유일한 한글편지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 상황과 아내에 대한 애틋함이 잘 드러나 있어 역사학, 국문학, 국어학 등 여러 분야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편지이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학봉은 아내에게 산음에 와서 잠시 머무르고 있는 자신의 안부를 간단히 전한다. 새해를 앞두고 보내는 편지인 만큼 장모를 모시고 새해를 잘 맞이하라고 당부하면서도 감사가 되었어도 음식을 아무것도 보내지 못해 미안해하고 있다. 자신과 떨어져 있을 아내가 염려되었는지 편지 말미에는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있으라고 하였다. [1]
김성일과 임진왜란
김성일이 아내에게 편지를 쓴 1592년은 임진년으로 왜란이 일어난 해였다. 그가 편지를 쓴 배경을 파악하려면 당시 조선의 시대 상황과 김성일의 행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마산 전투
김성일은 1592년 3월 임란이 일어나자 4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조선 시대에 각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의 무관 벼슬, 관찰사와 같은 직위이다.) 제직의 명을 받아 임지로 가던 중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마산으로 달려가 왜란에서의 첫 승리를 거뒀다.
당초에 김성일이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돌아온 후 왜군이 침입할 가능성이 적다는 보고를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선조는 이 일을 문제삼아 붙잡아 오라는 명을 내렸다. 김성일이 이를 듣고 급히 한양으로 돌아가던 중 그의 승전 소식이 선조의 귀에 전해졌다, 그 결과 첫 승전의 공을 인정받아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난리가 났을 때 백성들을 불러 타이르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로 발령받게 되었다. [2]
초유사(招諭使) 활동
김성일은 충청도 직산에서 초유사 이명의 명을 받자마자 바로 길을 돌려 전주, 남원, 운봉, 팔랑치를 거쳐 5월 4일, 경상우도 함양에 도착했다. 마침 함양에는 조종도가 장인의 상을 당해 와 있었고 이노도 의병을 거병하기 위해 와 있었다. 김성일은 곧 초유문을 지어 배포했다. 초유문은 상황이 우세하지는 않으나 몸을 바쳐 왜구를 토벌하고 나라를 지키자는 내용, 즉 의병 모집의 뜻을 담고 있었다. 당시 함양을 비롯한 경상도의 상황을 살펴보면 감사인 김수는 일찍이 군권을 쥔 채 도망하여 민심을 잃었으며 군사와 군량이 부족한 와중에 백성과 유생, 수령들은 마을을 버리고 산 속으로 도망하여 왜군의 침탈에 재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성일은 군의 체제를 수습하고 조종도와 이노를 보내 각 고을에서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이후 수령이 부족한 곳에는 수령을 세워 읍을 정돈하게 하고 일찍부터 의병활동을 하던 곽제우에게 글을 보내 그의 행적을 찬하였다. 이와 같이 일을 지휘하고는 함양을 떠나 산음 단성을 거쳐 진주로 출발하였다. 벌칙 조목을 정비하여 반포하고 막하의 사람들을 나눠 보내 여러 읍의 군사들을 사열하는 등 진주성을 얼추 정비하였다. 6월에 진주성이 얼추 안정되자 곧바로 떠나 거창, 합천, 영산, 창녕, 현풍 등을 돌며 군사를 모집하고 민생들 돌봤으며 선악적(善惡籍:여러 유생의 품행의 양부(良否)를 적은 기록)을 두어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 때 박성, 의병장 이정등의 의사들을 취합하여 군사를 보강하였다. 이후 7월에 왜적이 진주성을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출전하여 사천, 진해 고성 등을 다시 탈환하고 곽제우를 보내 현풍, 창녕, 영산 등의 왜적을 토벌하였다. 이 때 정경세, 권경호, 신담을 차임하고 이봉을 의병장으로 삼았다. [3]
진주성 전투
8월 11일에 김성일을 경상우도 초우관에서 경상좌도 관찰사로 발령하는 명이 도착했다. 원래 이 명은 6월 1일에 내려진 것이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도로가 혼잡하여 이 때에나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좌도 감사로 발령된 후에도 의병의 일은 김성일이 맡아 보고 있었으므로 지속적으로 일을 처리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김성일이 경상좌도로 떠난다는 소문을 들은 의사(義士)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경상우도의 유생들이 김성일이 떠나는 것을 만류하는 상소를 올려 한 달인 9월 4일, 다시 경상우도 관찰사로 제수되어 우도로 복귀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흩어진 의사, 의병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직함을 이용해 빈 고을에 수령을 세우고 군령을 엄히 다스려 기강을 바로잡았다. 10월, 산음에서 창원, 부산, 김해의 왜적이 합세하여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시민을 진주 목사로 승진시켜 진주성 방어를 독려하고 의령으로 가 여러 장수들을 경계하였다. 이때 왜적은 이미 진주성을 열 겹으로 에워쌌으며, 대오가 수십 리에 걸쳐서 뻗쳐 있었다. 이에 선생은 결사대를 모집하여 활과 화살을 많이 준 다음 밤을 틈타 남강(南江)의 허술한 곳을 통해서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게 해 장수와 사졸들을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게 하였으며, 첩자를 많이 보내 왜적의 정세를 정탐하게 하였다. 또 호남에 통문을 보내어 호남의 의병도 와서 살천(薩川)에 진을 쳐 형세를 돕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마다 모두 감격하면서 용기를 내어 죽기를 다짐하였으며, 김시민은 일체 명령대로 따라 계책을 내고 복병을 숨겨서 응전하였다. 왜적들이 7일 밤낮을 계속하여 공격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의 막사를 불태우고 쌓여 있는 시체를 태워버린 다음 도망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곧바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민심을 안정시켰다. 사람들이 승전의 공을 김성일에게 돌리자 “이것은 목사와 여러 장수들의 힘이다. 머리가 허연 썩은 선비가 무슨 공이 있겠는가.” 하고서, 왜적을 섬멸하여 공을 세우라고 면려한 다음 즉시 공을 세운 데 대해 표창하라는 계문을 올렸다. 이로 인해 김시민이 병사로 승진되었다.[4]
이 때의 공으로 11월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제수되었다. 다음 달인 12월에 선조에게 곧바로 상소를 올려 공을 세운 나머지 병사에게 포상을 내리도록 청하였다. 이 떄 미처 전란을 수습하기도 전 기근이 닥쳤다. 김성일은 쌀과 소금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구휼하였으며 여러 고을에 명을 내려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구황에 힘쓰게 하였다. 식견이 있는 사람을 뽑아 관장하게 하고 형식인 선에서 그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독하며 순시하였다. 관문(關文)이나 통첩(通牒) 등에 대해서는 비록 소소한 것이더라도 반드시 손수 지었으므로 간혹 밤중이 지나 잠들기도 하였다. 이에 피로가 쌓이고 소갈증이 들어 장차 큰 병이 될 상황이었다.
또 김성일은 닥친 일을 수습하는 데에 그칠 뿐만이 아니라 "내년에 씨 뿌릴 종자를 미리 조처하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물러가더라도 백성들이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전후로 곡식을 옮기기를 계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중간에서 지체되어 전달되지 못하거나 혹은 밖에서 가로막혀 보고되지 않았다. [5]
편지를 쓸 때의 상황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편지를 쓴 시기와 장소는 1차 진주성 전투가 끝난 후 기근으로 인해 표리걸식하는 도민들을 위해 도내를 돌며 순회하던 중 산읍에 도착했을 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편지를 살펴보면 당시 아내는 홀몸으로 어머니를 모시며 생활하고 있는 처지이며 자신은 감사를 지냄에도 곡식을 보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임란 중 김성일의 행적을 살펴봤을 때 사재를 털어 백성 구휼에 힘쓰느라 집에 부칠만한 여유분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편지에 나타난 도적은 왜적을 가리키는 것이며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만하지 않고 후일을 대비하던 김성일의 성격이 잘 드러난 구이다. 김성일은 다음 해인 1593년 4월 19일에 병을 얻어 29일 병사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김성일은 구황과 내년 경작 대비, 전쟁 대비로 인해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행장에 보면 '잠도 이루지 못했고 머리가 하얗게 샜다'라고 나와 있는데 아마 이 시기의 업무량이 병의 원인이 된 듯 하다. 이 편지는 김성일이 아내에게 쓴 마지막 편지로서 그 가치를 지니며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아내에게 편지를 부친 것을 볼 때 아내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인 안동 권씨는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전력부위(展力副尉) 권덕황(權德凰)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에 추봉되었다.[6]
시각자료
사진
관련 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김성일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A는 B를 저술했다 | 1592년 |
김성일 | 초유문 | A는 B를 저술했다 | 1592년 |
안동권씨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A는 B에 언급된다 | |
김성일 | 인동권씨 | A는 B의 남편이다 | |
산음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A는 B에서 출간되었다 | 1592년 |
임진왜란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A는 B와 관려이 있다 | |
진주전투 | 임진왜란 | A는 B에 포함된다 | |
김성일 | 진주전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김성일 | 이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김성일 | 조종도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김성일 | 김수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김성일 | 곽제우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김성일 | 김시민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김성일 | 이봉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김성일 | 정경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김성일 | 권경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김성일 | 신담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노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종도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김수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곽제우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김시민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김시민 | 진주전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이봉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권경호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정경세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권경호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신담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592년 | 학봉 김성일이 편지를 써서 아내 안동권씨에게 부쳤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609771 | 128.669643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가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소장되어 있다. |
참고문헌
- 단행본
- 김미영, 『학봉 김성일, 충군애민의 삶을 살다』, 예문서원, 2016
- 논문
- 김명준, 「임진년 진주대첩과 학봉 김성일」, 『경남문화연구소보』 제 30호, 2009
- 김명식, 「임진왜란시 김성일의 외교, 구국활동」,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 「대소헌 조종도의 행적과 사상 : 대소헌 조종도의 인물 현상에 대하여」, 『남명학연구』 38권, 남명학회, 2013
- 사료
- 『학봉집』
- 『용사일기』
- 『선조실록』
- 온라인
- '김성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70쪽.
- ↑ 김명준, 「임진년 진주대첩과 학봉 김성일」, 『경남문화연구소보』 제 30호, 2009
- ↑ 『학봉집』 부록 제 1권 년보. 온라인 참조: '만력 20년(1592, 선조 25) 임진. 선생 55세',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 『학봉집』 부록 제 1권 년보. 온라인 참조: '만력 20년(1592, 선조 25) 임진. 선생 55세',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 『학봉집』 부록 제 2권. 온라인 참조: '행장',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 『학봉집』 부록 제 2권. 온라인 참조: '행장',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