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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6176 두시언해]",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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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6176 두시언해]",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석==
 
==주석==

2017년 4월 28일 (금) 22:57 판

분류두공부시
한글팀 분류두공부시 언해 01.jpg
한자명칭 分類杜工部詩
영문명칭 A first copy of Korean annotation of Dubo’s poems
작자 유윤겸, 의침
원저자 두보
작성시기 1482년경
간행시기 조선전기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청구기호 D3C-33C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29.4×14.4㎝
판본 금속활자본(을해자)
수량 1冊
표기문자 한글, 한자


정의

문신 유윤겸 등과 승려 의침두보의 시를 주제별로 분류하여 언해(諺解)[1]간행한 초간본이다.

내용

유교적 이념을 담은 두보의 한시는 조선시대에 들어 유독 중시되었다. 세종부터 성종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 등의 문신과 승려 의침에게 명하여 두보의 시 1,647편과 다른 사람이 두보에게 써준 시 16편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언해하게 하였다. 전체 25권 17책이었는데, 현재 권1·2·4는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150여 년 뒤인 1632년(인조 10)에는 오숙(吳䎘)이 초간본을 원본으로 하여 교정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초간본 『분류두공부시언해』는 최초의 국역 한시집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중간본과 비교해 볼 때 지금은 사라진 순수 고유어를 풍부하게 구사하고 있으며, 중간본에 보이지 않는 자음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어국문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2]

부연설명

세종 시기 집현전 학자들의 주도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주제별로 분류한 두보의 시의 주석집)가 간행되었다. 이는 당시 문장화국(文章華國: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다)의 논리에 따라 사장(詞章)[3]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종집현전 관리들에게 두보의 시를 공부하고 주석을 정리하려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4]

성종 시기에는 이창신이 젊은 문신들이 경연에서 두보의 시를 공부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이에 그 스승으로 세종대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의 편찬에도 참가했던 유윤겸을 추천한다.(또한 유윤겸의 아버지 유방선은 두보의 시에 능통했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홍문관 문신들이 두보의 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고,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 편찬 작업의 바탕이 마련된다. 또한 1481년에 성종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과 해석이 난무하고 있으니 이를 하나로 정리하여 편찬하라는 '언해령'을 내린다. 그리하여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여 김흔 등의 홍문관 문신들이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 를 편찬한다.[5] 저자로 유윤겸과 더불어 의침도 이야기된다. 도록에서도 마찬가지로 의침을 저자로 기술하였다. 그러나 의침의 경우 이미 고인(故人)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의 편찬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의침두보의 시에 능통하였으며, 영통사의 주지였을 때(1399년), 12살인 유방선을 만나 두보의 시를 가르쳤다고 한다. [6] 이로부터 82년 뒤인 1481년에 시작된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의 편찬 작업에 의침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편 성종 시기 사장(詞章)[7]의 학풍과 경학(經學)[8]을 중시하는 학풍의 간극이 커져갔다. 홍문관의 젊은 문신들은 사장(詞章)의 학풍을 이은 김종직의 문하생들로, 이들은 기교를 중시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들은 유교 정신(경학)을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두보의 시에서 찾고자 하였다. 따라서 김종직의 제자 김흔이 쓴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의 서문에서 두보의 시에 담긴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신은 유학의 이상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동시에 세련된 격식을 갖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의 편찬 의도가 문장화국이며, 사장과 경학의 간극을 줄여 당시의 문학 논리를 정리하기 위한 국가적 작업이었다. [9]

시각자료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세종 찬주분류두시 A는 B의 편찬을 명하였다 1443년
집현전 찬주분류두시 A는 B를 저술하였다 1443년
찬주분류두시 분류두공부시 A는 B의 모델이다
성종 분류두공부시 A는 B의 편찬을 명하였다 1481년
유윤겸 분류두공부시 A는 B를 저술하였다 1482년
의침 분류두공부시 A는 B를 저술하였다 1482년
홍문관 분류두공부시 A는 B를 저술하였다 1482년
유윤겸 유방선 A는 B의 자식이다
의침 유방선 A는 B의 스승이다
유윤겸 홍문관 A는 B에 소속된다
이창신 홍문관 A는 B에 소속된다
김흔 홍문관 A는 B에 소속된다
김종직 김흔 A는 B의 스승이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43년 세종찬주분류두시의 편찬을 명하였다.
1443년 집현전찬주분류두시를 간행하였다.
1481년 성종이 분류두공부시의 편찬을 명하였다
1482년 홍문관이 분류두공부시를 간행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197 127.05438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분류두공부시가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단행본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杜詩와 杜詩言解 硏究』, 태학사, 1998.
    2. 이의강, 『杜詩諺解硏究』, 다운샘, 2006.
  • 논문
    1.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규장각』 3, 서울대학교도서관, 1979.
  • 온라인
    1. 권인현, "두시언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석

  1. 한문을 한글로 풀이함
  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68-69쪽.
  3. 문장(文章)과 시가(詩歌)를 말함
  4. 김남이, 「조선전기 두시(杜詩) 이해의 지평과 《두시언해(杜詩諺解)》 간행의 문학사적 의미」, 『동양어문학』 제58호, 동양어문학회, 2012, 125쪽.
  5. 김남이, 「조선전기 두시(杜詩) 이해의 지평과 《두시언해(杜詩諺解)》 간행의 문학사적 의미」, 『동양어문학』 제58호, 동양어문학회, 2012, 143-147쪽.
  6. 안병희, 「杜詩諺解의 書誌的 考察」, 『한국문화』 제19호, 서울대학교 규장학 한국학연구원, 1997, 7-8쪽.
  7. 문장(文章)과 시가(詩歌)를 말함
  8.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
  9. 김남이, 「조선전기 두시(杜詩) 이해의 지평과 《두시언해(杜詩諺解)》 간행의 문학사적 의미」, 『동양어문학』 제58호, 동양어문학회, 2012, 158-160쪽.